김교신, 한국 기독교의 희망
손원영/서울기독대학교 교수, (사)한국영성예술협회 대표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추앙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누구시오?”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김교신’(1901-1945)을 말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나에게 별과 같은 존재이다. 비록 나는 그 분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그는 언제부터인가 홀연히 나에게 다가와서 마치 동방박사들을 아기 예수에게로 안내했던 큰 별처럼 나의 삶을 그렇게 인도하고 있다. 참으로 감사하다. 사실 작금에 신학을 공부한 이들조차 김교신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최근 나는 어떻게 하면 김교신을 널리 알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관련 학회에도 가입하고 또 틈틈이 그의 전집과 여러 서적들을 읽으면서 주변에 김교신을 알리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 기독교에 대한 최악의 국민적 신뢰도와 약300만 명에 이르는 가나안신자(교회를 떠난 신자)에서 보듯, 날개를 꺾인 채 끝없이 추락하는 한국 기독교는 그의 사상과 삶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교신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그의 전집과 관련 서적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거니와, 다만 여기서는 왜 필자가 그에게서 한국 기독교의 희망을 찾고 있는지 세 가지로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김교신은 진정한 종교개혁자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가 16세기 초 당시 “교회(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가톨릭교회의 주장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외치며 진정한 기독교를 찾는 운동을 펼쳤다. 그런데 어떤가?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는지 500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기독교는 중세 가톨릭교회처럼 “교회(개신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교회절대론자이다. 그래서 현재 셀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교회절대론을 거부하면서,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부패한 교회를 과감히 떠나고 있다. 소위 ‘가나안’ 현상이 그것이다. 김교신은 일찍이 20세기 초 소위 ‘무교회운동’을 통해서 교회절대론에 저항하였다. 말하자면, 김교신은 원조 가나안신자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그가 교회 자체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가 비판한 것은 기독교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교회절대론자의 주장이며, 심지어 교회를 신격화한 교회권력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 시점에서 한국 기독교가 희망을 찾으려면, 김교신의 그 무교회 정신을 이제라도 본받아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교회절대론을 거부하면서. 대신에 그 중심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든든히 세우는 것이다.
둘째, 김교신은 기독교가 ‘성서의 종교’임을 믿고 그 연구와 실천에 철저히 매진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개혁 전통의 배경에는 성경이 그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 루터가 그러했고, 웨슬리가 또 그러했다. 그리고 김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교신은 식민지 조선을 구원하는 길도 성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고, 또 당시 부패한 조선교회의 구원도 ‘성서’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조선산 기독교’를 꿈꾸면서 매주일 성서연구를 위해 모이는 공동체를 일컬어 교회 대신에 ‘성서연구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성서연구 결과를 일반 대중과 공유하기 위해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개인이 발행한 잡지로는 가장 길고 또 가장 많이 발행하였다(1927-1942). 정말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성서연구는 결코 문자주의가 아니라 성서비평학에 근거한 자유로운 학문적 성서연구였다는 점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유학(儒學)을 비롯한 이웃종교의 경전들을 일종의 동양의 ‘구약’(舊約)으로 간주하면서 이웃종교를 존중한 점이다. 필자는 이와같이 김교신이 성서를 대하는 태도에서 한국 기독교의 희망을 본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성경공부는 하되 문자우상주의에 빠져있으며, 학문적 성서연구와 이웃종교의 경전을 금기시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가 다시 이 민족의 희망이 되려면, 김교신처럼 다시 성서의 종교로 돌아가서, 성서를 학문적으로 철저히 연구하고 또 이웃종교의 경전과 대화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셋째, 김교신은 일상 속에서 기독교적 앎과 삶의 일치에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앎과 삶의 불일치 아닐까? 하나님을 사랑으로 이해하면서도 이웃을 차별하고 미워하며, 겸손과 나눔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임을 잘 알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만과 욕심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앎과 삶의 철저한 불일치이다. 하지만 김교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성서연구를 통해 깨달은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자신만이라도 공적인 삶 속에서 묵묵히 실천하려는 ‘공적개인’(公的個人), 곧 언행일치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 예컨대, 그는 당시 거의 모든 한국인이 창씨개명을 할 때에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고, 교실에서는 일본어 대신 금지된 한글로 수업하였으며, 지리교사로서 <조선지리소고>에 나와 있듯이 학생들에게 조선 땅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손기정 선수를 비롯한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존경하며 그의 뒤를 따른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혹자는 말한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 기독교가 박해와 변절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목회자나 신학자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김교신 같은 신실한 소수의 평신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필자도 그런 주장에 기꺼이 동의한다. 『성서조선』 폐간의 원인이 되었던 <조와>(弔蛙)라는 글에서 김교신은 엄동설한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개구리의 이야기를 언급한 바 있는데, 그 죽지 않고 살아남은 개구리는 다름 아닌 김교신 자신이었다. 비록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한 김교신, 바로 그가 조선 기독교의 희망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 오늘 한국 기독교의 죽음을 알리는 ‘조와’의 고통 속에서도 비록 소수지만 김교신의 후예가 있다면, 그들은 다름 아닌 한국 기독교의 미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