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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가 부르는 조용필의 ‘꿈’
대학 시절 저는 클래식 음악 공부를 하느라 대중음악에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뒤늦게 7~80년대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을 들어 보면 음악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민족적 감성의 측면으로나 그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발견합니다. 최근에는 김수철의 노래와 그가 연주한 기타 산조, 신촌블루스 그리고 조용필의 노래를 들으며 그 시대의 문화에 경탄과 존경 어린 찬사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몇 주 전 오후 예배 설교시간에는 조용필의 노래 가사를 소개하면서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져 매우 당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에 관한 설교를 여러 번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란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면서 삭개오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관점의 시작은 그 이야기의 배경인 ‘여리고’라는 도시와 ‘삭개오’라는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여리고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출애굽 이야기에서부터 등장하여 지금까지도 요단강 서안의 크고 중요한 도시로 남아 있습니다. 비록 그 이름은 여려 보이지만 그 유명한 강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는 곳으로 예수님 당시에도 가장 크고 번성하고 화려한 도시였습니다. 물류와 돈이 모이는 곳이었고 인간적인 꿈을 이룰 수 있는 최적의 곳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곳에서 큰 꿈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히브리 이름 ‘자카(Zakkai)의 헬라식 형태인데,그 의미는 ‘순수한’ 혹은 ‘의로운’이라는 의미입니다. 용감하게 돌감람나무(뽕나무)에 올라간 것과 예수님을 만나고 회개하고 통크게 변한 것을 보면 삭개오는 그 이름 그대로 매우 순수하고 저돌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삭개오는 부모님이 큰 기대와 소망 가운데 지어 주신 그 이름 그대로 살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금수저들이 먼저 출세했고 반칙과 거짓을 뻔뻔하게 행하는 사람들이 늘 저만치 앞서 있었습니다. 게다가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음과 인성과 실력보다 먼저 외모로 사람을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외모에, 눈에 보이는 외적인 모습과 스팩을 쌓는데 앞다투어 영혼을 팔 듯 살았습니다. 그럴수록 삭개오는 더 큰 박탈감을 느꼈습니다. 왜 착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은 손해 보고 항상 뒤처지는 것일까? 세상은 왜 이리 정의롭지 못하고 불공평한 것일까? 큰 꿈을 안고 큰 도시 여리고에서 열심히 살았지만 삭개오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깊이 좌절했습니다.
1991년에 발표한 가수 조용필의 ‘꿈’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가수 조용필이 이 곡을 직접 작사 작곡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왜 요즘에는 다들 말초적인 감각만 따를 뿐 조용필과 같은 우리네 삶의 깊은 부분을 노래하는 가객이 없는 것인지 참으로 아쉽습니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 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이 노래는 삭개오의 젊은 시절을 엿보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비단 삭개오의 이야기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젊은 시절 순수한 마음으로 부푼 꿈을 안고 세상에 뛰어들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익숙한 가족의 품을 떠나 직업전선으로, 사업으로, 인간관계로, 화려한 삶을 꿈꾸며 화려한 도시에 발을 디디었습니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대학 시절 저는 진리에 갈급했습니다. 모든 것이 어설펐던 저는 참된 스승과 좋은 선배를 만나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다들 나름대로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심지어 교회조차 말을 해 주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삭개오처럼 저도 나름 열심히 살았습니다.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는 명절에도 기숙사에 홀로 남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노래 연습을 했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친구 어머니가 명절 음식을 보내 주셨었는데 그제서야 집에 계신 어머니 생각에 찬합 속의 음식을 뜨거운 눈물에 말아서 먹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삭개오와 같은 좌절을 우리 또한 경험했습니다. 세상이 녹록지 않음을 깨닫고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눈물이 흘러흘러 뜨거운 눈물을 먹는 경험을 했습니다. 살면 살수록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음을, 세상에 대해 알면 알수록 어두운 부분이 더욱 많고, 생각보다 거짓과 위선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을 바라보며 분노하지만, 모르는 사이 어느새 자기 자신도 그러한 세상에 동화되어 버린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더욱 절망합니다.
요즘 TV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랑받는 프로그램은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합니다. 화려한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서 은거하듯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 시대가 그토록 오랫동안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 노래의 마지막 가사에 있습니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을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화려한 도시의 삶 보다 차라리 홀로 눈을 감고 고향의 향기를 듣는 삶을 택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자연인들도 프로그램 밖의 일상에서는 나름의 고충이 있을 것입니다. 일례로 이번 수해 때 그 프로그램에 자연인으로 나왔던 부부가 함께 산사태 피해를 당했다고 하지요. 화려한 도시에서 입은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또 다른 반대편의 선택을 한 것이지 스스로 고립을 택한 자연인의 삶도 그렇게 멋진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삭개오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을 싫어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세상 속에서 정면돌파를 택했습니다. 세상 보란 듯이, 자신을 경멸하고 세상에서 떵떵거렸던 사람들 보란 듯이, 그들의 방식대로 출세하고 돈을 벌어서 당당해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빌딩 숲 초라한 골목에서 삭개오는 뜨거운 눈물을 닦고 일어섰습니다. “세상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너보다 더 세상적인 모습으로, 더 악착같은 모습으로, 더 지독한 모습으로 너를 이겨내리라!”
삭개오는 해냈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이 되었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삭개오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막상 원하는 것을 다 이루게 되자 그 모든 것이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그의 삶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
이제, 누가복음 19장 삭개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대로 삭개오는 한 음성을 듣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https://youtu.be/zpz4zYFYjZo
조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