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장마 속에
기나긴 장마가 물러가는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장마 기간일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비와 관련된 소식이라면 이젠 징하다는 표현이 저절로 나온다. 한번 휩쓸고 간 수마의 무서움이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엊그제는 청주에 일이 있어 가는 도중에 순간 쏟아지는 비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때마침 이번 수해로 인명 피해가 났던 오송 부근이었고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예상치 못하게 겪는 자연 재해가 무서운 것은 알지만 미처 손쓰지 못한 인재는 안타까움을 배가시킨다.
요즘 농부들은 장마 기간 속에서도 바쁘게 지낸다. 사실 이렇게 내리는 빗속에서 비닐하우스가 아닌 노지의 작물을 관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흙은 물을 잔뜩 머금었기 때문에 밭고랑에 들어서면 밭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어떤 때는 두 발이 진흙에 묶여 빠져나오려면 고군분투해야 한다. 한 발을 빼면 다른 발이 빠지기를 힘써야 한다. 어떤 때는 발을 잘못 디디다가 그대로 미끄러지기도 한다. 밑창이 닳은 신발을 신고 작업을 하다가 몇 번 가랑이가 찢어지는 고통을 맛보기도 했다. 미끄러지는 순간 몸의 균형을 잡으려다가 손목을 다칠 때도 있었다. 장마 속이라도 무언가 하려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온몸이 골병이 들곤 한다.
이번 장마로 참깨 수확은 포기하기로 했다. 파종할 때 고생하고 보식을 여러 번 했다. 복토를 하고 솎아주기도 했다. 풀도 잘 뽑아주고 고랑에 부직포도 깔았다. 처음에는 좀 괜찮다 싶었는데 역시 장마에 버틸 재간이 없었는가 보다. 비를 많이 맞아 키가 클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비속에서도 키는 자라지 않았다. 키는 작은데 쓰러지는 것은 왜 이리 많은지. 쓰러진 것들을 세우려 했으나 물만 먹은 참깨대가 약하고 여렸다. 일으켜 세울 때마다 똑똑 부러졌다. 성질이 났다. 참깨들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세우는 일을 멈췄다. 그 이후로 참깨는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한다. 올해 참기름을 구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토마토도 정리 중이다. 웬일인지 이번 토마토는 모종을 심고 몇 주 잘 자란다 싶었는데 어느 날부터 부실해지기 시작했다. 토마토 풋마름병이라고 하여 토마토 상단 부위가 아래로 쳐지고는 회복하지 못하고 말라서 죽어가는 것이다. 병에 걸린 토마토는 애초에 싹을 잘라 버리고 새로 심었으나 그것마저 나의 마음을 시름케 했다. 결국 지난 주일 가위를 들고 자르고 뽑고 던져버렸다. 토마토를 좋아하는 나에겐 아쉬운 것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리고 그나마 살아있는 토마토는 수탉의 먹잇감으로 사라지고 있다. 서열이 높은 수탉을 피해 달아난 곳이 하필 토마토 아래였다. 내일은 먹을 수 있겠지 하던 기대는 번번이 빗나갔다.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따려 가까이 가면 이미 수탉에게 쪼여 먹지 못했다. 그래서 덜 익은 것을 따다가 후숙하여 먹기도 했다. 그렇게 올해 토마토는 장마 속에 사라지고 있다.
콩과 들깨는 잘 자라고 있다. 콩은 제법 컸다. 멀리서 보면 저것이 콩일까 풀일까 할 정도다. 가까이 가서 보면 콩이기도 하고 풀이기도 하다. 손가락에 꼽을 만큼 빈 것을 제외하곤 심은 콩이 모두 자란 것 같다. 작년에는 이웃집 토끼가 탈출하여 우리 밭에 와서 사는 바람에 참깨와 콩을 3분이 1이나 잃었다. 그래서 올해는 어떻게 해서든 토끼를 잡으려고 했는데 작년 겨울이 엄청 춥지 않았던가. 다행히 올해는 토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꽃이 피려면 좀 기다려야 하지만 그전에 내가 할 일은 콩순을 치는 것과 거름을 보강해주는 것이다. 콩순치기는 손으로 따도 되고, 낫을 휘두르기도 하고, 예초기로 윗부분을 쳐서 날리면 된다. 올해는 콩 덕을 보고 싶은데 그것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될까. 지금 잘 자랄지라도 수확 때가 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들깨는 나의 손길이 가지도 않았는데 심은 작물 중에 제일 잘 되었다. 어느 풀숲에서 나타날 토끼와 고라니와 새의 피해를 막으려고 콩을 가운데 심고 가장자리에 들깨를 심었는데 콩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모든 것을 잘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낭패일 수 없다. 올해 이것이 잘 되면 내년에는 다른 작물이 잘 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어느 작물이든 잘 관리하고 수확하기까지 많은 정성과 돌봄이 이전에 했던 것보다 더 필요하다. 자식을 대하듯이 마음을 쏟는다. 이 세상에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자식 키우는 것과 작물 키우는 것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나의 수고와 정성은 꼭 정비례하지 않는다. 결실에 너무 기대다가는 실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농사는 겸손해야만 다치지 않는다. 장마가 지나가면 태풍이 올 것이다. 갈수록 태산이라지만 그럴수록 더욱 마음을 내려놓는다. 이런 것들을 보면 나도 농부의 자질을 조금씩 갖춰가는 것 같다. 내 고집과 기대를 내려놓게 된다는 것, 하늘의 순리를 따르려 하는 것은 진정 감사할 일이다.
황은경/농촌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