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은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어야
보수주의나 진보주의는 정치적 용어다. 이 용어들은 18세기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에서 태동했다. 프랑스의 시민들은 절대 왕정에 반대하여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워 정치적 혁명을 일으켰는데, 절대 왕정을 지지하는 사람을 보수주의자로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에 기초한 시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을 진보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는 노동자, 농민 계급을 위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새로운 진보주의가 유산계급(부르주아지)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민주주의와 대립하면서 종래의 민주주의는 보수주의가 되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보수와 진보의 정의에는 공통점이 있다. 보수는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것을, 진보는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는 것을 말한다.
한국의 교인들 가운데에는 진보적 정치인을 공산주의자라고 보는 보수주의자가 많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를 타도하자는 전광훈 목사의 선동에 많은 교인이 호응했고 보수당의 정치인들이 그의 옆에 섰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당대 사회에서 혁신적인 분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의 기준으로도 진보적인 분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예수님이 진보적이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분을 본받아야 하는 기독교인은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역설적 상황에 처한 것 아닌가?
기독교의 보수성
보수주의자들은 전통을 중시한다. 그런데 구약시대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 신앙을 고수하는 기독교는 보수적이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와 능력을 강조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는 기독교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절대 왕정을 생각나게 한다.
합리성을 중시하는 과학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이 볼 때,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신을 믿는 종교적 신앙은 전근대적인 신념이며 보수적이다. 과학과 대립하는 교회의 보수성은 교황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정죄한 데서, 그리고 교회가 진화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데서 잘 드러난다.
보수주의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비관적 견해를 취한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아담이 타락한 결과 인간에게는 악을 행하는 본성이 있다고 말한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달리 말하면, 교회에서는 성악설을 내세운다.
특히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남한과 종교를 불신하는 북한의 공산 정권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정치적으로 보수적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특히 6·25를 전후해서 북한에서의 신앙적 박해를 피해 남한으로 내려온 교인들이 세운 교회들은 태생적으로 강한 우파적 성향을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보수성은 신학의 보수성으로 이어진다.
예수님과 바울의 진보적 태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는 공산주의자들이 표방하는 것과 상통하는 진보적인 면이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유물론을 내세운다는 면에서는 기독교와 대립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자나 농민 같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앞세운다는 면에서는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셨던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예수님은 병든 자나 가난한 자들 같은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셨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가난한 성도들을 도우라고 적극 권면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의 복지에 힘쓰는 것은 분명히 진보적인 자세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오만과 위선적인 태도를 강력하게 비판하신 데서 기득권층의 권위주의를 부정하는 진보주의적 태도가 나타난다. 그리고 주 안에서는 종과 자유인, 여자와 남자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바울의 가르침도 계층이나 성별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진보적 자세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 바울은 열방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인종 차별과 문화 우월주의를 무너뜨렸다. 이러한 종족과 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한 데서도 예수님과 바울은 진보적이었다.
마치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적인 면에서는 보수적이며 예수님의 삶을 따라사는 삶의 면에서는 진보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그들의 당파적 이익을 위해서 사사건건 대립할 때, 기독교인들이 보수와 진보의 어느 한 편을 무조건 편들면서 팬덤 정치를 부추기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정치인들의 당파적 주장에 휩쓸리지 말고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갖고 사안별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보수성이 강한 한국 교회에는 보수란 반개혁적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보주의가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하고 보수주의는 점진적인 변화를 원한다.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혁주의자들은 보수적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기독교인이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역설적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기독교의 중심에는 역설이 자리하고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롬 5:20)라는 성경 구절, ‘은혜의 하나님이 인간의 노력을 요구하신다’는 사실, ‘죽으면 산다’는 십자가의 원리, 그리고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다’라는 교리, 이 모두가 역설이다.
‘기독교인은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것 역시 이러한 역설들 중의 하나다.
최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