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창 7:15).
그리스도는 언제나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기가 있었고 또 능력이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그리스도의 비유적 가르침을 떠나서 다른 방법에 의해서는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었으며, 또 결코 받을 수 없었습니다. 성공적인 사역자는 자기의 입을 먼저 비유로 열게 마련입니다.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사역자는 먼저 주님을 가까이서 모방하고, 또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전하게 마련입니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비유를 고안해 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비유를 고안해 내는 희귀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란 참으로 찾아보기 힘듭니다. 나로 말씀드려도 그런 영예로운 부류에 속한다고 고백할 수는 없는 처지올시다. 나는 때때로 비유를 하나 만들어 보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따금씩 하나의 상징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소 쉬운 듯합니다마는, 결단코 비유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더군요. 나는 그런 비유를 만드는 일이 나의 소관은 아니라고 생각하고서 그저 만족할 따름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했는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하게만 활용한다면 수많은 비유의 암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설교의 주제가 부족해서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많은 비유들을 능히 발견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나는 오늘 저녁 여러분에게 하나의 비유를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방주의 비유올시다. 내가 이 방주의 비유를 말씀드릴 때에, 먼저 여러분께서는 이 방주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하셔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 방주는 실재했던 실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방주는 진실로 물 위에 떠서 그 속에 노아와 그의 온 가족, 그리고 “모든 육체를 둘씩”넣고서 표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런즉 이것은 하나의 틀림없는 사실적 실물이었습니다. 결단코 신화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이 실제적인 사실을 취해서, 다시 그것을 하나의 비유로 사용해서 은혜를 끼쳐 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방주를 구원을 대표하는 것으로 봅니다. 나는 오늘 이 방주의 비유를 여기서 말씀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에게 전하는 바입니다. 홍수에서부터 구원한 방주는 구원의 수단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영원한 멸망의 홍수에서부터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Ⅰ. 첫째로, 이 비유를 말씀드리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의 수단은 단 하나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잣나무로 만든 이 방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인격이야말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유일한 수단입니다. 방주에 있는 복 받은 사람들을 제거하고는 온 세상이 다 익사했습니다. 제아무리 강한 짐승이나 작은 곤충까지라도, 위풍당당한 코끼리와 보기조차 흉측한 기어 다니는 동물까지도, 날아다니듯 빠른 말과 느림뱅이 달팽이까지도, 얌전한 양과 추악한 두꺼비까지, 하여간 지면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의 공통된 운명에 처해 버리고 말았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예외가 있다면 방주 안에서 생명을 건진 생명체들입니다. 최고의 본능을 부여받은 제아무리 고상한 동물이라 할지라도, 헤엄치는 능력을 갖고 있었건만(비록 물고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모두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단지 방주 안에 피난하고 있는 것만은 제외되었지요. 그토록 최고로 강한 날개를 지닌 날짐승들도, 공중을 누비고 날았건만 날기에 지친 날개를 떨어뜨리고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단지 방주 안에 있는 날짐승만은 예외였습니다. 대낮에 겁도 없이 날아다니는 숲속의 저 거만한 새들이나, 또는 밤에 남몰래 배회하는 새들이나, 아무리 강하고 힘센 짐승이라도 다 그 광대한 깊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마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방주의 피난처에 피신한 것들은 다 구제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이 비유를 적용하면서 천하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구원방법 밖에는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이름은 단 하나 뿐입니다.
부한 사람이여, 그대는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대가 진정 가난한 자가 되어 자비로 구원을 받는 일 이외에는 달리 무슨 방도가 없습니다.
지성인들이여, 그대는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대도 역시 가장 무지한 사람이 되어 자비로 구원을 받는 일 이외는 달리 무슨 방도가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방주는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뿐입니다. 방주 외에는 다른 구원의 방도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인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의 계획이 없습니다. 괜히 사람들은 시내산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물은 15규빗 위로나 더 우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괜히 자기기만과 자기의 세상적인 공덕의 최절정에까지 오르고 있습니다. 그래 보아도 빠져 죽습니다. 구원의 여망이 없이 익사합니다. 왜냐하면,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고전3:11)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방주에 왔던 사람들과 기타 모든 것들이 단 한 가지 방법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계획되는 그리스도를 반대했습니까?
그렇게 했더라면 그들은 저주를 받아 멸망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다른 여타의 소망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계시된 구원의 계획을 너무 비천한 것으로 생각했습니까?
그렇게 했더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물에 가라앉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강하게 밀어 닥친 홍수아래 가라앉았을 것이며, 기타 모든 육체가 불가항력적인 파도에 견디어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구출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방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피난처를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2:3)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수단으로 여러분의 영혼과 몸을 함께 구원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안정된 구원을 위해 여러분은 무슨 방안을 고안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만든 피난처는 마침내 거짓된 피난처임이 판명될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우박이 내려치며, 폭풍이 일 때에 여러분이 만든 피난처는 부서지고 맙니다. 그런즉 구주님은 단 한분뿐이십니다. 오직 한분뿐이십니다.
Ⅱ. 내가 이 방주 비유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여러분께서 방주의 규모에 유의해 주시기를 당부해 마지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15절을 읽어보시면 방주가 굉장한 규모의 크기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장이 300규빗, 광이 50규빗, 고가 30규빗이며”(창6:15)라고 했습니다.
지면에 살고 있었던 여러 종류의 피조물을 수용할 만한 충분한 방이 방주 안에는 없었다고 옛 불신앙적인 사람들은 반대해 왔습니다마는,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에 입각해 볼 때에, 만일 그 방주 안에 그 당시 살아남았던 여러 각이 한 종류의 피조물을 충분히 수용할 방이 없었더라면, 다 물에 빠져 죽었을 것인데, 각 종류의 다소가 안전하게 구출을 받은 것을 보면, 그들을 모두 수용할 방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것이 매우 논리적일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나, 만일 우리가 계시를 믿을진대 우리에게는 충분히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어느 누구도 모든 피조물을 받아들일 넓은 방이 방주 안에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또 우리로 말하더라도 그들의 그런 반대를 용납할 이유가 전연 없습니다. 왜냐하면 매우 저명한 계산가들이 방주로 불리우는 이 배는 엄청나게 큰 배이며, 따라서 단순히 모든 피조물을 수용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방주가 물위에 떠 있을 한 해 동안에 필요로 하는 모든 식물까지 싣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나는 이 사실을 시간을 내어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방주의 규모를, 구원계획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비유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이 얼마나 포용력 있는 계획인고! 방주는 거대한 방주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류의 피조물을 수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도 지대한 구원자올시다. 그래서 모든 형태의 죄인들을 다 구원하십니다. 방주는 거창한 배였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큰 짐승들이 그 속에 들어 있어서 염려 없이 지날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구원도 거창한 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사람이 그 구원 속에 들게 되었습니다. 편협된 마음을 지닌 고집쟁이는 자기가 상상해 놓은 개념에다가 구원을 제한시키고 하는 말이 “나와 같이 팔을 끼고 보조를 함께 취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구원 받을 자가 없을 것이다”고 합니다. 참으로 가련하고 비참한 사람이올시다! 이런 사람은 자기 치수에 따라 옷을 잘라 놓고서, 만인이 다 똑 같이 그렇게 옷을 잘라 입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노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위대한 구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도저히 셀 수 없는 무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많은 죄인들이 운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두가 구주의 필요성을 절감하신다면, 여러분이 천국에 거할 방도 충분히 있게 마련입니다. 여기 많은 청중이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께서 마음으로 회개하고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으시고,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신다면 여러분을 수용할 충분한 방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직 여유의 방이 있다”는 말은 참으로 진실된 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 들어갈 방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방은 없습니다. 위선자가 들어갈 방은 없습니다. 아니 없고 말고입니다. 형식주의자가 들어갈 방은 결단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한 개개 죄인이 들어갈 방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의 구속자는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속자는 여러분을 그대로 다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구속자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을 이끄셔서, 비로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되었다면, 여러분들이 들어갈 방은 분명코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선택의 교리를 우리가 설교한다고 해서, 소수인의 선택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이것이 흔히 범하는 과오임을 나는 발견했습니다.
혹자는 내게 와서 말하기를 “목사님, 나는 목사님의 칼빈주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칼빈주의는 선택받는 자의 수는 얼마 되지 않으며, 기타 모든 사람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니 말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닙니다. 칼빈주의는 전연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칼빈주의는 우리 사람이 도저히 셈할 수도 없는 큰 우리가 선택되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그 중에 하나인지 누가 압니까? 실로 칼빈주의는 알미니안주의 설교가보다도 소망에 대해 천배 이상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알미니안주의 설교자가 서서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다.
“만인이 누구나 들어갈 방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오게 만드는 여하한 특수한 은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거듭거듭 나오지 아니하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과오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나오게 하시지는 않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자력으로 나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마는, 알미니안주의자는 사람들이 자력으로 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련한 죄인은 자기가 스스로 나올 수 없음을 느끼고 있으나, 알미니안주의자는 죄인이 원하기만 하면 자력으로 나올 수 있노라고 강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가련한 죄인은 때때로 자기가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나 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으나, 사실상 자기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없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러나 눈먼 인도자는 이런 죄인에게 말하기를 그런 것은 다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말이지 여러분이 하나님에게로 나오는 것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사역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항변할지 모르나 결국 나오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여러분을 제지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속에 힘을 주십니다. 오늘날 어디서든지 전개되고 있는 저 공상적이고, 꾸민 이야기 속에서보다도 복스러운 하나님의 순수한 복음 속에서 여러분을 위한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시의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백성들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두시는 곳에서는 소망이 넘칩니다.
Ⅲ. 셋째로, 주목하셔야 할 것은 방주는 안전한 피난처였다는 사실입니다.
노아는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방주에 물이 들어오는 구멍이 없도록 “역청으로 안팎을 바르라”(창6:14)는 명령까지 받았습니다. 방주가 정박할 항구도 없었습니다. 또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불러 물을 퍼내라고 한 말도 우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전연 물을 퍼내는 작업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방주에는 구멍이란 도무지 없었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일 년간엔 폭풍우도 있었겠습니다마는, 우리는 방주가 파선의 위험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말이지, 바위들도 너무 저 밑바닥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방주의 밑바닥에 접촉할리가 없었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물이 불어서 15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창7:20)고 했습니다.
이 방주는 아무리 높은 산 보다 27피트나 더 높이 떠 있었기 때문에 흘러내리는 모래 따위를 두려워할 것도 없었습니다. 산과 모래들이 모두 다 이 방주 저 밑바닥에 깔려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 방주가 바람에는 부딪치며, 또 때때로 폭풍에 얻어맞기도 하며, 우박으로 뱃머리를 치이기도 하며, 번개가 밤중에 빛을 내는 등 많은 위험이 겹치고 쌓였지만, 방주는 끄덕도 하지 않고 항해하고 있었으며, 이 방주에 있는 것이라고는 어느 것 하나도 밖으로 던져지지 않았으며, 어느 선원도 물을 퍼내기에 지쳐있지를 아니했으며, 또 배의 안전을 위해 수리작업을 하느라고 진땀을 뺀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상은 온통 물속에 잠겨 파멸했지만, 이 방주 하나만은 유유히 승리를 거두며, 물결 위에 두둥실 떠 있었습니다. 방주는 안전했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안전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죄인된 여러분, 내가 여기서 여러분에게 권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안식처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는 구멍이 없습니다. 방주가 결단코 가라앉지 아니했으며, 또 어떤 요소도 그 방주를 우세할 수 없었던 것과 꼭 같이, 바로 그리스도가 전연 그런 실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패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정사와 권세들이 그리스도에 굴복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폭풍에서부터 피신됩니다. 그들은 결단코 망하지 아니하며, 또 주님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의 모형을 주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노아는 깊은 샘물이 단 하나도 터지기 전에, 그리고 보복의 구름에서부터 파괴의 폭풍우의 한 방울이 미쳐 떨어지기도 전에, 방주 만드는 작업을 완결했습니다. 복수의 진노의 구름이 인간의 허물로 인해 내려치기 이전에, 우리의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섭리 속에서 한 분의 온전하신 그리스도를 세워두셨다는 것도, 조금도 틀림이 없는 사실이올시다. 하나님의 가련한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 피난처를 구하러 초대 받기 이전에, 하나님의 위대한 중재의 사업은 완성되셨던 것이올시다. 나는 천사들이 하늘의 창문을 넘어 흉흉하는 물결을 바라보고서, 그 방주가 어떻게 저런 수면에 안전하게 떠 있는가를 보고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로 방주 자체만큼이나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고, 또 그렇게 틀림없이 확신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자신만큼이나 안전하게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하등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산처럼 움직이지 아니하며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니,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며 무엇을 하든 형통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일단 예수께 나아와 그에게 위탁하면, 물속에 가라앉을까 하는 걱정은 조금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폭풍이 일며, 태풍이 여러분 주위에 휘몰아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거하기 때문에 바위에 부딪칠 위험이 전연 없습니다. 일단 여러분이 구원선에 올라탄 이상에는, 아무리 홍수가 나도 모래에 휩싸여 꼼짝 못할 처지에는 결단코 이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여러분께서 하나님과 그의 은혜의 말씀으로 나오시기를 명하는 바입니다.”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이미 믿고 계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여러분이 안전하게 보호함을 받고 있다는 이 교리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 예배에 참석하신 주님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 중에, 단 한분만을 접촉해 보기만 해도 곧장 그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때때로 이 예배당 밖에서 논쟁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진리를 믿지 아니하는 소수인들이 진리를 논박해옵니다. 나는 이 진리 논박에 대한 방어를 여러분에게 일임하고 마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가운데서도 용감한 진리의 강한 옹호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진리의 섭리를 언제나 선언하듯이 진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Ⅳ. 지금 나는 이 비유의 다른 면을 더 보고자 합니다. 방주 안에 있는 피조물들이 빛을 원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방주에는 창이 하나 밖에 없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6장 16절에 보면 “방주에 창을 하나 내라”고 했습니다.
나는 흔히 의아해 온 것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피조물이 어떻게 단 하나의 창을 통해서 볼 수 있었겠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조금도 의문되지는 아니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하나의 교훈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믿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단 하나의 창밖엔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은 오직 하나의 방법에 의해 비침을 받습니다.
방주의 유일한 창은 우리에게 성령의 사역을 적절히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칠 빛은 단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이 빛에 의해서만 비침을 받을 수밖에 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그 빛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진리의 성령님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죄와 의와 심판을 알게 됩니다. 기타 어떤 죄에 대한 깨달음도 진정한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교훈 밑으로 나아올 때에 우리는 우리의 허물과 비참함을 알게 되며,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구속과 피난처를 압니다. 방주에는 창이란 단 하나뿐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 사역자를 통해서 빛을 보기도 하고, 저 사역자를 통해서 빛을 보기도 했습니다.”라고 합니다.
내 친구여. 지당한 말입니다. 그러나, 창은 하나뿐입니다. 우리 사역자들은 유리창과 꼭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는 아무런 빛도 보유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을 따름입니다. 그 후에 유리의 여러 면에 따라 빛의 여러 그림자를 던집니다. 가령 여러분은 잘 닦아 놓은 설교자를 모시고 있습니다. 이럴 경우 윤이 나도록 잘 닦아 놓은 설교자는 매우 투명하지는 않지만 색 유리와 같아서, 빛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보다는 밖으로 나가게 하는 데에 명수입니다.
또 다른 유리창의 어느 면도 있습니다. 이 설교자는 정방형으로 깎아 놓은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는 구식적인 설교자입니다마는 좋은 유리라서 빛을 잘 통과시킵니다.
또 어떤 유리창의 면은 보다 세련된 모습으로 절단해서, 이런 설교자는 간단하고 단순한 설교자입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도 빛은 통과합니다.
자, 이렇듯 유리창의 면, 다시 말해서 설교자의 성품에 따라 빛이 나가는 모습이 각양하지만, 그러나 빛도 하나요, 창도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의 빛”(고후4:6참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분은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전할 때에 단지 한분의 교사외는 없습니다.
가령, 어느 형제는 오늘밤 영국 국교에서 말씀을 전할 수도 있으며, 또 어느 형제는 독립교회 신도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지도 모르며, 또 어떤 형제들은 침례교인들 가운데서 전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간 그들 모두는 단 한분의 성령님을 모십니다. 그들이 진정 하나님에 대해 배울진대 모신 분은 성령 한분뿐이십니다.
방주에는 창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방주에는 1층, 2층, 3층이 있었지만 모두가 내다보기는 오직 하나의 창을 통해서입니다. 1층에 있는 작은 성도라 해도 오직 성령님의 한 창을 통해 빛을 얻으며, 2층에까지 이를 성도라해도 역시 동일한 그 한 창을 통해 빛을 얻으며, 가장 높은 층에까지 오른 성도도 역시 동일한 창을 통해서 빛을 얻을 수밖에는 달리 어떤 수가 없습니다. 방주에 만들어 놓은 오직 하나의 창, 곧 성령님의 창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달리 빛을 보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 창을 통해서 보아 오고 있었습니까? 또는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눈이 침침하여 도무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을 때라도, 우리 주님께서 주장하셔서, 우리의 모든 어두움과 곤경을 통해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아 오고 있었습니까?
Ⅴ. 여러분이 유의해서 본장을 읽어보신다면, “방주 안에 칸들 ~방들~을 만들라”(창6:14)는 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에 이 구절이 방주라는 비유에서 어떤 하나의 요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즉 그것은 내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는 사실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방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그냥 되는 대로 함부로 집합해 놓지는 아니했더라는 것입니다. 방주 안에는 칸들(방들, Rooms)이 있었습니다. 비록 한 방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방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서거나 앉기를 같이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방주 안에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에게는 웨슬레교도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도 같은 방주 안에 있습니다마는, 단지 우리와는 다른 방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침례교도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지요. 우리는 그들이 우리 방에 들어오는 것도 환영합니다. 독립교파 교도들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또 저쪽 다른 방에 있습니다. 장로교도들과 감독파교도 친구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교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방주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제각기 다른 방에 있기는 하지만, 역시 하나의 동일 방주에 있는 것만은 부정 못할 사실입니다. 두개의 복음은 없습니다. 나는 동일한 복음을 주장하는 한 사람을 발견하는 한, 진정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진대, 어떤 체제의 교회 정치를 택하든지 그것은 전연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일단 그 사람이 방주 안에 있는 한 어느 방에 들어 있었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기록된 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엡2:8)고 한 사람들에 속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를 일단 형제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다 한 방에 들어 있을 것으로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코끼리가 호랑이와 살 수 없으며, 사자가 양과 더불어 같이 누울 수는 없습니다. 피조물의 종류에 따른 개개의 방들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각이한 교파들이 있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우리 가운데 혹자는 어떤 일정한 교파에 편안히 안주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영국 교회에서는 보다 많은 해방을 갈구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장로교회에서는 보다 많은 자유를 갈구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웨슬레교회에서는 보다 건전한 교리를 갈구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어떤 과격파 침례교회에서는 보다 따스한 형제애를 갈구하는 바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모든 교파와 전적으로 다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고로 자기 머리를 때때로 이쪽 방으로 두고, 또 때때로는 저쪽 방으로 들어 밀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향해 “여러분이 이렇게 다 방주에 있는 이상,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가 넘치시기를 빕니다”라고 말해 줄줄 아는 도량 있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Ⅵ. 방주에는 비록 많은 방들이 있었으나 오직 문은 하나 밖에 없었더라는 사실을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그 문은 옆으로 내라”(창6:16)고 하였습니다. 우리 구원의 방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입니다. 두 사람의 그리스도가 전파될 수는 없습니다. 이 예배당에는 이 그리스도를 전하고, 저 예배당에는 저 그리스도를 전하는 따위는 없습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1:8)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복음은 하나뿐입니다. 우리는 각처에서부터 의인을 다 맞아들입니다마는, 각처의 모든 사람을 도매금으로 다 의인으로 맞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경건한 사람을 택해냅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악한 사람 가운데서도 “은혜의 선택에 따른 남은 자가 있음을”(롬11:5)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문은 하나뿐입니다.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다”(요10:1)고 했습니다.
방주에는 단 하나의 문 밖에는 없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자세가 굽어있는 아장아장 거니는 오리들이 우리에 들어가듯이, 낙타와 표범처럼 그 머리가 다른 동물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짐승이라도, 단 하나 밖에 없는 동일한 그 문으로 들어가노라면, 부득불 목을 떨어뜨리고 숙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통해 진정 교회에 들어오려면, 그들의 곧은 목을 꺾고 그들의 교만한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이 그토록 빠르고 달팽이가 그토록 느림뱅이라도 다 한 문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탕자와 탕녀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들어오게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제거당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모든 짐승들이 한 문으로만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들이 그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버티고 서서 말하기를 “우리는 그 길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끝내 밖에 섰다가 홍수에 사로잡혀 멸망당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들어갈 문은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길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얻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 불문하고 “멸망 받게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 얻을 구원의 소망은 도무지 없습니다.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문이라”(요10:9)고 말씀하셨습니다.
Ⅶ. 이 비유를 보아가면서, 여러분은 이 방주에는 여러 층이 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 여러 층들은 같은 높이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방주에는 상 중 하의 3층이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비록 하늘나라로 인도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간에는 여러 계층이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봅니다. 저 밑 아래층에 살면서 슬퍼하고 있는 딱한 나의 형제도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항상 부른다는 노래가 겨우 이렇습니다.
“하나님, 어찌 여기는 이렇게 곤고한 땅이오니까!”
그는 방주의 저 밑바닥 앙상한 판자위에 삽니다. 그는 결코 행복을 모르고 삽니다. 가끔, 조그마한 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기도 합니다마는, 대개는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서 행합니다. 실로 보는 것이란 거의 없습니다. 그의 상태는 언제나 신음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참으로 딱한 삶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탈선된 설교자”의 말을 가서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겪은 하나님의 가족의 깊은 체험만을 전부인양 마냥 즐겨하기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는 말만을 듣기를 좋아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매우 우울한 생활이라고 묘사하면, 그는 여러분의 그런 묘사를 좋아합니다. 그것은 그의 삶이 언제나 그 모양으로 우울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우울한 삶이 정상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언제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라고 하는 성경 본문만 골똘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방주의 저 아래층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도 역시 방주 안에 있는 것만은 부정 못할 사실입니다. 비록 그런 사람이 믿음이 약하고 의심이 많기로서니, 우리로서는 그를 함부로 야단쳐서 멸망 받은 사람인양 해서는 안 됩니다.
“너는 방주를 상 중 하 3층으로 할찌니라”(창6:16)고 했습니다. 우리 형제 가운데 어떤 사람은 2층에 있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나는 안전하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비록 때때로 곤경을 당하지만 나의 이 머리가 파도에 밀려가지 않고 굳건히 버티고 서리라는 소망은 가지고 있다. 이따금씩 하나님께서 ‘하늘의 물방울’을 내게 주기도 하신다. 때때로 나는 시온산과 같아서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이 사람은 2층에 있습니다. 그러나 2층에 있는 이 사람이라고 해서 저 배 밑바닥 1층에 있는 사람보다 더 안전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더 기쁘기는 합니다. 그들이 방주 안에 있는 이상 어느 누구나 다 안전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로 말씀드리면, 3층에 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나는 언제나 거기 높은 데 살고 싶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성도들이 모여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골3:16) 그런 곳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때때로 저 아래층으로 부득불 내려가는 신세가 되고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나는 사닥다리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1층에 있을 때 안전했던 것보다도, 꼭대기 3층에 있을 때가 더 안전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령 내가 가장 아래층에 있었을 때에 물결이 배를 쳐서 나를 익사하게 했다면, 내가 비록 가장 높은 3층에 있을 때라 할지라도, 바로 동일한 그 물결에 의해 익사하기는 매일반입니다.
우리 가운데 혹 제아무리 고상한 사람이든, 또 제아무리 천한 사람이든, 하여간 우리 모두가 한 배에 올라탄 선원이라고 할진대, 그 동일한 배가 우리를 다 싣고 있어서 우리를 갈라놓지 않습니다. 혹 낙담하고 있는 여러분들이 계시면 지금 나오십시오. 여러분이 위치한 곳이 저 배의 바닥짐을 싣고 있는 배 밑바닥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언제나 시련과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아,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일단 방주 안에 있는 한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힘이 되시고 의가 되시니 말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큰일입니다. 나는 저 밑바닥에만 항상 있으니까요. 나는 배가 침몰할까봐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어리석지는 마십시오. 어떻게 여러분의 심장은 그토록 무의미한 공포를 품고 있습니까?
나는 런던 대화재 기념탑에 올라간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기념탑을 반쯤 오르다가 갑자기 이 탑이 진동해서 곧 무너질 것이라고 소리치고 곧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념탑은 무너지지 아니했습니다. 지금까지 그 탑은 안전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다 하더라도, 그 기념탑은 조금도 끄덕도 없이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신경질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가라앉게나 하지 않을까 겁을 내고 있습니다. 물결이 뱃전을 스치기도 합니다마는, 그것이 배를 상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더 탄탄히 배를 전진시킬 따름입니다. 주께서 배의 키를 잡고 계십니다. 그래도 마음에 확신이 들지 않습니까?
그 배는 많은 파도를 넘어 지금까지 아무런 사고 없이 표류해 왔습니다. 그래도 마음에 확신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게 많은 파도를 이기고 버티어 나왔건만, 그래도 여러분 마음에는 신뢰심이 증가하지 않습니까?
배를 침몰시키는 것은 실로 큰 파도임은 사실입니다마는, 결코 그런 파도가 있지를 않을 것입니다.
어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구원의 위대한 방주시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피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파멸시킬 권세가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는데, 누구라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복스러운 확신입니다. 우리는 아주 안전합니다. 우리는 언약의 방주에 있는 만큼 너무도 안전합니다. 방주 밖에는 모든 위험이 있지만 방주는 끄덕도 없이 물 위에 유유히 떠있었습니다. 마침내 이 방주가 아라랏 산에 안착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들도 함께 나오게 하라.”(창8:16~17)
그리하여 사람과 동물의 조사가 다 끝났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안전하게 땅에 내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백성의 온전한 숫자를 하나도 멸망함이 없이 그대로 아버지께 제시해 드릴 것입니다.
Ⅷ. 마지막으로 방주의 비유에서 나의 주목을 끄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방주에 들어갔던 동물의 종류가 각양했다는 점입니다.
다음과 같은 진술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여”(창7:2)라고 했습니다.
이 위대한 방주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모두를 구원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원은 정결하거나 부정한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위한 구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정결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만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면에서 존경을 받습니다. 그들의 사회생활은 비난의 여지가 없습니다. 상업을 하는 데에도 정확합니다. 그들의 계산서에는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이웃 사람들에게 속임수를 부리지 아니하며, 방자한 행동을 해서 깨끗한 이름을 더럽히는 예도 없습니다. 그들의 성품은 온후해서 그들의 모친들은 어린 시적부터 그들로부터 하나의 과오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몸서리치는 부도덕의 오염을 모르고 성년이 됩니다. 그들의 하는 행동은 경건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은 실로 누구 앞에도 추천할 만하여,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그런 사람들을 보시고 사랑할 정도입니다. 하기는 그리스도께서 부드럽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권고하여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만, 하여간 그들은 율법에도 굉장한 열심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홍수의 파멸이 전 세계적이었기 때문에 방주로 들어가지 않고는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정결한 짐승도 방주에 들어가야만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그지없이 선하고 그지없이 그 성품이 정결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도 그리스도를 필요로 합니다. 본인이야 알든 모르든 그리스도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더할 나위 없이 선하고 훌륭한 사람일지 모르나 그래도 여러분은 구주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무언가 부정한 것이 있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생애는 정결을 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결단코 정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짐승들도 정결한 짐승과 마찬가지로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엔 앞에 말씀드린 것과는 정반대의 계열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소년 시절부터 악을 배워 온 사람이 없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부도덕한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는 없습니까?
저 옛날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노골적으로 모독적인 언행을 저지르던 길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저 시궁창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의 입술에 이르기까지 잠기어 처참한 지경에 이르러, 주정뱅이가 되고, 욕설을 퍼붓는 망나니가 되고, 주일날 교회도 나오지 아니하며,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우리가 부정한 짐승이라고 할 만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방주는 여러분과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만들어진 것입니다. 제아무리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하나님 존전에 설 때에 여러분보다도 더 훌륭한 위치에 서는 것은 아닙니다.
그도 여러분과 같은 방법으로만 구원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나 그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공통된 구원에 의해 구원 받습니다. 달리 어떤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 받는 모든 사람에게는 단 한분의 구주 밖에는 없습니다. 진실로 구속함을 받은 여러분 각자에게는 오직 단 하나의 구속 밖에는 없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정한 짐승들은 법정과 뒷골목과 수도의 더러운 빈민굴에서 나올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태여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부정한 짐승을 성자일스(St.Giles~ 7세기 프랑스에 살던 그리스의 은자 불구자 거지 등의 수호 성인~역자 주) 집에서처럼 성 야고보(St.James)의 집에서도 얼마든지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소위 “상류층”이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악은 실컷 즐긴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양친 부모의 권위의 법칙을 쉽사리 깨뜨립니다. 여러분은 어머니의 눈물을 조소하고, 아버지의 충고를 비웃습니다. 죄악을 물마시듯 합니다.
학교 시절부터 죄악을 물마시듯 하기를 마치 욕심쟁이 황소가 물을 마시는 듯이 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거친 방탕생활을 자랑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들이 범했던 그 악을 허풍을 떨며 승리인양 말합니다. 여러분은 거친 씨앗을 뿌려놓은 것을 자랑합니다. 비록 여러분은 좋은 모범을 보이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지나온 과거는 참으로 너무도 악명 높은지라, 뉴개이트 감옥(런던의 구시가 서문에 있었던 유명한 감옥~역자 주)에서도 여러분들만큼 증오스러운 부정한 짐승을 내어놓지 못할 것으로 나는 생각이 듭니다.
자, 지금 나는 여러 계층의 죄인들을 향해 설교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부정을 느끼고 슬퍼하시면, 비록 여러분은 부정하다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자비가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간구합니다. 먼저 방주로 들어오십시오. 그리하면 결단코 내어 쫓김을 받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하신 것처럼 여러분을 명해서 오라고 하실진대, 하나님은 여러분을 결단코 내어 쫓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방주는 정결한 것은 물론 부정한 것을 위해서도 있습니다. 방주는 양을 위해서는 물론 돼지를 위해서도 있는 것입니다. 무해한 비둘기를 위해서도, 물론 독이 있는 독사를 위해서도 있습니다. 산비둘기를 위해서도, 물론 육식을 즐기는 갈가마귀를 위해서도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각 종류마다 소수가 다 들어왔습니다. 사단의 돼지의 한 마리처럼 그토록 욕심 많던 죄인도 들어오면 구원받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어린양 같은 죄인도 들어오면 구원받습니다. 어디 온유한 죄인을 위한 방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구원의 위대한 방주에 동일한 문을 통해 들어오지 아니하면 별 수 없이 빠져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피조물들을 좀 더 세분해 볼가요. 여기엔 기는 것들도 있었고 나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피조물을 위해 방주의 문이 열리던 아침에 아마 여러분은 공중에 나는 갖가지 새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독수리 한 쌍, 참새 한 쌍, 매 한 쌍, 까마귀 한 쌍, 벌새 한 쌍 등 날개를 가지고 창공을 날며, 저녁 미풍에 노래를 속삭이던 갖가지 새들의 종류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다 방주에 들어 왔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땅을 보시면, 거기에는 기는 것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달팽이 한 쌍, 뱀 한 쌍, 벌레 한 쌍 등입니다. 그런가 하면 달려가는 생쥐 한 쌍, 저기 기어가고 있는 도마뱀 한 쌍. 깡충깡충 날고뛰는 메뚜기 한 쌍도 있습니다. 공중에 나는 피조물이 쌍쌍이 있음은 물론 기는 피조물의 쌍쌍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들어서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 가운데 혹자는 그 지식이 너무도 높이 나르는 것과 같아서, 나로서는 그들의 그 위대하고도 폭넓은 지혜를 다 헤아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분 가운데 혹자는 무식해서 성경도 읽지 못합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문으로 오기 위해서는 독수리로 날아 내려와야만 하고, 개미도 기어 올라와야만 하는 법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단 하나의 출입구 외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나는 새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땅에 기는 파충류들도 구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지식도 없고, 명성도 없고, 명예도 없고, 존귀도 없는 아무런 주목을 끌 만한 사람도 되지 못한 그야말로 가련하고, 무식한 땅에 기어 다니는 피조물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땅에 기어 다니는 자여, 앞으로 나오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제거하시지 아니하십니다. 나는 저 가련한 달팽이가 어떻게 저렇게 땅에 기기만 하느냐고 흔히 의아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 달팽이는 여러해 전부터 저렇게 기어오고만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혹자는 이미 여러해 전에 출발했건만, 아직도 달팽이처럼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련한 달팽이여, 그래도 그대는 따라 나오십시오!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대로 집어 올려서 1야드나 또는 2야드쯤 들어주어도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방주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직도 방주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어이된 것인지 참으로 이상하기만 합니다. 다시 말씀해서, 여러분이 그토록 가까이 교회 문전에 오면서도, 교회에 들어와 한 무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어이된 것인지 참으로 이상하기만 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다 함께 결국은 방주 안에 들어 왔다는 사실을 다시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판단해 보아도 땅에 기고 있는 파충류에 불과하다고 해서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혹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해 볼 때 가장 낮은데 처한다고 느껴지더라도 거기서 낙담하지 마시고 나오십시오. 여러분이 제아무리 비천하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나오는 것을 막을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비천한 사람일수록 나는 더욱 더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노아 당시 그날 아침에 모인 무리는 과연 얼마나 괴상한 장면이었을까요? 그러나 노아는 그 모든 종류의 피조물을 지성으로 방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