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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92]
 
 
 
     
 
 
 
작성일 : 13-11-21 15:22
스펄전 설교-창세기(1) 7. 에녹(창 5:21~24)(히 11:5,6)(유 1:14,15)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47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1~24)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 11:5,6)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 1:14,15).

이제 방금 내가 봉독해 드린 세 성경 구절들은 에녹에 관해 갖고 있는 권위 있는 지식이올시다. 그런 만큼 옛 주석가들의 터무니없는 공상 따위를 덧붙인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7대손입니다. 이 에녹은 아담의 3대손인 가인 계열의 또 다른 에녹과는 명백히 구별됩니다. 처음 족장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은 기쁘게 진정한 종교에 대한 진리의 부분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들 옛 사람들은 친히 하나님에게 배웠을 뿐만 아니라, 그들 당시의 교사들이었으며, 그들에게 위대한 진리가 전시되던 모형들이었습니다. 아벨은 제사를 가지고 하나님께 접근해야 하는 필요성을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하면 피의 속죄의 필요성을 가르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제단에 어린 양을 놓았으며, 자기 자신의 피로 자기의 증거하던 것을 인쳤습니다. 속죄는 너무도 귀한 진리입니다. 이를 방어한다는 것은 값진 행위입니다. 처음부터 이 속죄는 순교자를 필요로 하는 교리입니다. 이 순교자는 죽었으나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 셋과 에노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저들의 신앙의 분명한 고백과 대중 예배의 필요성을 가르쳤습니다. 에노스와 셋 당시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습니다. 속죄 제사를 통해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기타 사람들과는 스스로 구별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아 예배하고 있습니다. 아벨과 더불어 위대한 제사를 마음으로 믿고, 그 다음에는 셋과 더불어 입으로 그것을 자백해야 합니다. 이 후에 에녹이 왔습니다. 그는 속죄를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정도 이상의 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과 친교해야 한다는 위대한 진리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로 믿는 사람과 자기 자녀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 얼마나 가까이 와서 계셨던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의 지식의 진보가 족장들의 교훈의 성장에까지 이르기를 빕니다.
형제들이여, 아벨이 어린 희생양처럼 된 것을 압니다. 여러분은 보혈을 믿으며, 믿음으로 여러분은 모든 지극히 합당한 예물을 하나님께 가지고 옵니다. 여기까지 진전한 것이 사실입니다마는, 우리 대부분이 일보 더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소명을 받아 예수를 따르겠다는 공언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은 세례(혹은 침례)의 엄숙한 장사행위 안에서 된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 세상을 향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으로 여기고, 새 생명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습니다. 이후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위에 있어서, 이젠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교회에 모여 친교의 탁자를 놓고 둘러 앉아 기도와 예배의 모임으로 연합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중심은 주님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중심은 주님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해왔습니다.
우리는 아벨과 함께 한 길로서의 예수의 제사를 보았으며, 셋과 함께한 진리를 고백했습니다. 이젠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에녹과 함께한 생애를 알기로 합시다. 우리는 에녹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행하기로 합시다.

거룩한 족장의 생애를 회고해 보면, 우리는 그 생애를 본따고 싶어집니다. 족장이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가 어떤 환경 아래서 그런 위인이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 그 족장이 뜻하던 핵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경건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망하는 일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하기를 갈망합니다. 우리 영혼의 간단없는 외침은 우리 주님에 대해서 “나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하는 말입니다.
나는 어제 이 세상에서 한 훌륭한 생을 살다간 사람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는 우리 대부분보다도 더 잘 하나님을 사랑했고, 경외했으며, 섬겼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름난 헌신적인 형제였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마지막 한 가지 소원을 편지로 써서 한 친구에게 보냈습니다. 그가 이 편지를 쓸 때는 자기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으로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내용인즉, “나는 에녹의 생애를 실천하고 싶네.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오, 하나님과 좀 더 가까이 했으면”

그는 여러분과 내가 느끼던 사실을 썼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그러하다면, 또 명실 공히 여러분들이 분명코 주님의 백성들이라고 한다면, 내가 바라기는 에녹의 생애를 생각하셔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소원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시기를 비는 바입니다.

첫째로,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로, 에녹의 그 특이한 생애와 관련된 환경은 어떠했습니까? 이것은 매우 교훈적입니다.
셋째로, 그런 생애의 종말은 어떠했습니까? 그 종말은 생애 자체만큼 특이한 것입니다.

Ⅰ. 첫째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히브리서의 그의 설명에서 이 문제를 우리로 생각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 것은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저를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란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고 했습니다. 이것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에 대한 사도의 해석임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아주 옳은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아니하는 사람과는 동행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마음의 일치가 없이 동행할 수 있습니까?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과 모순되게 행하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과 동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틀립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친목, 우정, 친교,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이런 요소들이 하나님과 사람 간에 있을 수 없습니다. 분명코 엘리야처럼 에녹은 우리와 같은 육정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도 모든 인류와 같이 아담의 죄 안에 떨어진 사람이며, 우리가 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죄를 가지듯이 그도 죄가 있었으며, 양떼와 같은 우리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행위와 행동에 있어서 그도 길을 잃고 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도 사죄와 정결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그런 것이 필요했던 것이나 매한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즐기기 위해서는 그도 우리처럼 사죄를 받고 칭의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죄를 사함 받고 의를 전가받기 이전에는 하나님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자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말해 왔듯이 우리 인격이 칭의를 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지당한 말을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노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과 같이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이것은 아주 유의해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의 길이 우리에게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에녹이 어떤 특수한 은사와 재능을 수단으로 하거나, 놀라운 일을 해냈거나, 또는 기적적인 역사를 이룩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그저 절망하고야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면, 다시 말해서 죽어가는 도적을 구해준 그 믿음, 여러분과 내 속에 역사해 온 바로 그 믿음을 통해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 머리에 있는 그 작은 문이 염려 없이 우리에게도 열려 있는 것이랍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만 있으면, 우리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믿음을 동경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영적 생활의 최고 수준도 바로 이 낮은 영적 수준에 의존하고, 이 낮은 영적 수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진정 동행하기를 원하면,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요는 은혜 안에 있는 어린 아이처럼 단순한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최고의 성도의 신분도 먼저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제 아무리 강한 신자라 하더라도 가장 연약한 신자 정도의 삶도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용사들 가운데 가장 강한 측들에 속하도록 성장하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믿음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시작했습니다마는, 육안에서 완전하게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전진하지도 못하고, 생을 영위하되 도무지 아무 것도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행함은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계속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 너희가 그 안에서 행해야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녹은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게 된 이유는 언제나 그는 믿었으며, 신앙의 능력 안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가 알고 기억하고 있어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을 보지는 아니하고, 우리의 감정을 통하여 어떤 추상적인 고차원적 외모의 종교생활을 추구하는 시험을 받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예수 자신에게서 돌려서 우리 자신들 속에 있는 그의 형상을 찬양하는데 급급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자신만을 바라보는 일에 그치고, 우리 속에 있는 그의 형상만을 찬양하고, 우리를 바라보는 데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만다면, 우리는 전진은커녕 후퇴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우리도 에녹처럼 됩시다.

다음으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을 읽어볼 때에, 우리는 에녹이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곁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과 동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동행할 때는 그가 분명 거기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얼굴은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발자국 소리는 듣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다고 분명히 지각합니다. 자, 이제 우리가 다시 히브리서를 보면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에녹의 믿음은 이해하는 믿음입니다. 에녹은 모든 것을 믿되 신조를 딱딱하게 믿는 것처럼 믿지는 아니했으며, 그런 것들을 선반에 모셔 두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에녹은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는 머리로만 뇌까리는 단순한 정통파만은 아니었습니다. 진리가 그 마음속에 파고들어 갔습니다. 그가 믿은 것은 그에게 사실대로였습니다. 실제적으로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일상생활에 겪는 사실만큼이나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에 관해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해 상상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해 논의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해 읽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해 말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과 동행했었더란 말입니다. 이 동행이야말로 참된 경건의 실제적이고도 경험적인 부분입니다. 그의 일상생활에 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셔 주심을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살아 계시는 친구로 여겼습니다. 그는 그 친구를 믿었고 그 친구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한 것입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최고의 형태에 이르려면, 여러분이 믿음으로 받아 가긴 그들 모든 것을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받아 가진 모든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받아가진 모든 것을 여러분은 실체와 실증으로 삼으십시오. 그것들을 확인하시고, 바라보시고, 손으로 처리하시고, 여러분의 깊은 영혼으로 음미하시고, 그 모든 것을 조금도 의심 없이 다 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보셔야 하며, 아직 즐길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가되심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에녹의 신앙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관찰하시며, 판단하시며 인간의 행위를 보상하십니다. 진실하신 실제의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동행은 불가능합니다.

그 다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사를 읽을 때에, 그것은 에녹이 지극히 높으신 자와 매우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다는 의미라고 확신하는 것이올시다.
나는 친구와 늘 동행하는데서 나오는 교제 그 이상으로 자유롭고, 유쾌하고 성실한 교제는 없다고 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의 가장 절친한 친구를 찾아보려고 할진대, 그 사람과 매일 같이 다니는 사람이 분명히 그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일 것이라고 봅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나는 그의 집에 때때로 들어가서 잠시 그와 자리를 같이 하노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나는 날이면 날마다 그와 더불어 들판을 걷고 산을 오르곤 한다”는 말과는 천양지차가 있는 말이겠습니다. 걷는 가운데서 친구 간에는 대화하는 사이가 됩니다. 한 친구가 자기의 고충을 털어 놓으며, 상대방 친구가 그 말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에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친구는 이제 자기편에서 자기의 숨은 비밀도 같이 나눕니다.
사람들은 흔히 제좋은 짝을 택해서 동행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들 간에 벌어지는 대화는 낯선 사람은 아무도 엿들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한 사람을 철저하게 다 알아보려고 하면, 일단 그 사람과 한 동안 이야기를 건너보려 합니다. 걸으며 이야기해보면, 평범한 가정생활에서는 감추어 있던 그 사람의 전모습이 드러납니다. 계속 동행한다는 것은 친구간의 친밀한 교제와 굉장한 친숙미를 더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바로 행동하는 가운데서 인간들과 동행하시려 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에녹과 동행했습니다. 그 후에 많은 사람들과도 계속 동행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그 비밀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만 계시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기쁨을 찬양으로, 우리의 슬픔을 기도로, 우리의 죄를 자백으로 다 고합니다. 우리 마음의 모든 근심을 하나님의 마음속에 부려놓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시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하나님 자신이 그들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사상을 나눠 주시듯이 그의 무궁한 사랑도 부어 주십니다. 이것은 기독교 체험의 꽃이며 맛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백합이며 장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향이며 몰약입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생활의 단맛을 맛보시려면, 그것은 이해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와 긴밀한 교제로 들어가는 가운데서 맛보실 수 있습니다. 에녹은 바로 곧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다음 “행한다”는 말 속에서 하나님과 맺은 에녹의 교제는 계속적이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옛 신학자가 잘 설명한 것처럼, 에녹은 하나님과 돌아선 적도 없고, 하나님의 교우를 떠난 적이 없이 수백 년 동안을 동행하고 지내왔습니다. 본문이 의미하는 것이 이것이니, 곧 그의 365년이란 전생의 목표가 하나님과의 동행이었던 것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이전에도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동행입니까?
300년 동안의 동행이라니 이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사람들은 어떤 사람과 동행을 하고 있을 경우 동행친구를 한번 바꾸어 보았으면 하기도 합니다마는, 에녹은 하나님과 3세기를 두고 동행한다는 것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 족장은 시공을 초월해서까지 동행했으며, 나중에 그대로 낙원에까지 걸어가고 말았습니다. 거기서도 지금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곳은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세계니까요. 그는 땅에서 천국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땅에서 하늘로 그토록 쉽사리 날아가는 것도 조금도 이상스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발작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식하는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는 이따금씩 고상한 경건에 기어오르다가 미지근한 늪지대로 떨어지곤 한 것이 아니라, 날이면 날마다 그는 조용하고 행복하며, 평온한 교제를 하나님과 계속했던 것입니다. 밤에 잠을 잔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동행의 교제가 중단된 것도 아니며, 낮에 일거리가 많다고 해서 그 교제를 위태롭게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 교제는 별안간 급하게 달리거나 펄쩍 뛰거나 분발해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꾸준한 동행이었습니다. 그저 계속하고 계속하는 동행입니다. 행복한 3세기를 그는 동행했습니다. 그러다가 에녹은 하나님과 더 많은 교제를 하는 경지로 들어갔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에녹의 생애가 전진적 생애였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혼자 걷거나 기타 다른 사람과 더불어 걷거나 할 때는 전진하게 마련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게 마련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200년 지난 뒤에 와서는 그는 처음 시작했던 곳에 있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같이하던 동행은 언제나 그 동행이었습니다. 그는 똑바로 전진해 나간 것입니다. 30년이 지난 끝에 이르러서 에녹은 보다 많이 즐겼고, 보다 많은 것을 이해했고, 보다 많이 사랑했고, 보다 많이 받았고, 보다 많이 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면에 전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은혜와 하나님을 아는 일과 그리스도를 닮는 일에 성장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강하고 성결하며, 교훈을 받으며 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사람이 되지는 않으면서도, 다만 해를 거듭해서 하나님과 영구한 동행을 할 수 있거니 생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는 에녹의 생애는 영적 전진의 생애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힘에서 힘을 더해 가면서 귀한 순례자 대열에 앞장을 섰습니다.

우리는 좀 더 에녹의 동행에 관해 고찰해 보기로 합시다. “킷토의 매일 성경 읽기”에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아주 재미있게 예시한 것이 있습니다. 꼬마 아들의 손을 잡고 아들과 더불어 산들바람이 부는 언덕을 오르고 있는 아버지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용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당신과 함께 동행하는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아버지된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다시 말해서 냉담하고 잔인한 이 세상은 그 아이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 사이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의 사랑은 지금 그가 앞으로 느끼거나, 또는 아버지된 당신이 앞으로 받을 그 어느 사랑보다도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 아이가 당신과 더불어 기쁘게 동행하듯이, 당신도 하나님과 기쁘게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그런 어린이들에게는 기쁜 일입니다. 길이 험하고 날씨가 사나워도 아버지와 손을 잡고 콧노래를 부르는 어린이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아닙니다. 그저 아버지와 동행하는 것만으로 더할 나위 없이 기뻤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저 언덕과 골짜기를 가리켜 줄 때에, 자녀들이 아버지를 쳐다 볼 때 눈에는 빛나는 웃음이 깃들고, 마주 잡은 손에는 따스하고 부드럽고 정겨움이 있습니다. 그러한 동행은 또한 단순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어린이는 자기 아버지를 이 세상사람 가운데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 어린이는 자기 아버지를 이 세상의 강하고 현명한 모든 것의 화신인양 여깁니다. 자기 아버지가 말하고 행동한 것은 무엇이나 감탄해 합니다. 그가 아버지를 따라 가노라면 그의 아버지에 대해 최고의 애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의 경외심도 역시 굉장합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곁에 매우 가까이 있습니다. 그는 꼬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를 자기의 왕으로 여겨 쳐다봅니다. 더욱이 그러한 동행은 온전한 신뢰의 동행입니다. 그 소년은 길을 잃을 세라 염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의심 없이 믿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팔이 감싸주기 때문에 아무런 위험도 없습니다. 그런즉 그렇게 신경 쓸 것이 없습니다. 왜 신경을 쓰겠습니까? 길 조심하는 것은 아버지가 할 일이기 때문에 어린이는 그런 염려 따위는 꿈에도 할 것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염려하겠습니까? 어떤 험한 곳을 지나가야만 할 경우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번쩍 들고 나아갑니다. 또는 그곳을 지나가는데 직접 도우기도 합니다. 어떤 아이는 새처럼 즐겁기만 합니다. 즐거워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는 사람도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의 영원한 친절에 의탁하고, 틀림이 없는 사랑을 마냥 즐겨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장래 걱정이나 지금 걱정이나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친구여, 여러분의 아버지께 의탁하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아무 사람도 아무 천사도 없는 것같이, 오직 하나님은 그대를 보호하시도다.

어린 아이가 지혜롭고 이야기를 나눠주시는 양친부모와 함께 나누는 동행이야 말로 얼마나 교훈적인 동행이겠습니까?
그는 아버지의 지혜를 통해서 많은 수수께끼를 해결해 보았으며, 또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소년이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그는 그런 친교로 나아가는 현명한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가운데서 그들의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온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여, 과연 여러분들은 행복의 사람들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깊이 알고 많은 지혜를 가진 사람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깊은 것에 들어간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에녹의 생애는 또한 거룩한 생활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결코 거룩한 길을 벗어나서는 행하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진리, 공의, 그리고 사랑에 따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와 반항하는 자와는 동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사람은 바르고 거룩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에녹의 생애는 행복한 생활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짝을 하고도 불행할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한 길은 결코 황량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길동무가 되심을 인정하시면, 여러분의 길은 기쁜 여정이 되고 평화의 오솔길이 될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분명히 동행했습니다. 그런 만큼 그의 순례는 안전하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위대하신 여호와는 얼마나 훌륭한 보호자이신지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사람은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그 오른편에 주 하나님을 모시고 동행하고 있는 사람을 해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법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영예로운 일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왕과 동행해 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왕의 위엄을 찬양하고 있는 자라서, 만일 왕이 자기들을 보고 한번 슬쩍 미소만 보여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하물며 만왕의 왕과 동행한다는 이 영예야말로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일평생을 그토록 복스럽고 유일하신 권세자와 동행하도록 허락을 받는다니 얼마나 고상한 전매특허입니까! 하나님 대왕의 동행자가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된다는 은총을 입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여호와는 천지와 지옥을 다스리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주이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영예가 될진대 어떻게 동행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에녹은 동행하는 생활이 안전하고 복되며 거룩하고 영예로움을 발견했었습니다. 나는 이것보다 더 훌륭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야말로 황금 생활입니다. 이와 맞설 것이 세상에 어디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Ⅱ. 둘째로, 우리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을 때 관련된 환경이 어떠했던가를 보기로 합시다.

첫째로 드릴 말씀은 솔직히 말해서 에녹 생애의 세부적인 내용이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녹에 관해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에녹에게는 특권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역사가 없는 나라가 행복한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역사가 있는 나라라는 것은 사실 전쟁과 혁명과 유혈로 뒤범벅이 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행복하고 평화스럽고 번성한 나라는, 파다한 이야기 거리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끌 만한 건더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그에 관해 장문의 자서전을 쓸 수 없는 처지의 에녹은 사실은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까지의 에녹의 모든 인생경력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말로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는 이 몇 마디 말로 족했습니다.
가령 여러분이 어떤 농부의 농장에 들러서 관찰한 후에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시다.
“나는 온 들판을 노란 꽃이 마치 황금 옷을 입은 듯 덮은 것을 보았습니다. 황금 옷 위로는 흰 꽃이 아름답게 피었더군요. 수레국화꽃도 눈을 드러내 놓고 있더군요. 온 들판은 울긋불긋한 꽃의 일색이더군요.”
자,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합시다. 여러분은 마치 어린이처럼 그 농부의 밭이 매우 아름답더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농부는 머리를 돌립니다. 왜냐하면 농부는 그 농장이 잘못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농장은 잡초 꽃으로 가득차 있을 뿐 진짜 농작물은 맥을 추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농장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 그저 담담하게 “뭐, 밀만 한밭 가득 있더군요. 밀밖에 없더라니 까요” 말했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한 말은 비록 간단하지만 매우 만족한 것입니다(왜냐하면 농장에는 농작물만 있는 평범한 것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 눈부신 많은 사건과 충격적인 일들, 그리고 화제 거리가 된 모험들이 한 사람의 재미있는 자서전을 내어 놓을 만하고, 따라서 매력을 끌게 할지는 모릅니다마는, 그런 수다한 사건들은 삶의 진정한 우월성을 드러내 주지는 못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받아 일하도록 정해진 장소에서 조용히 하나님을 계속 봉사해 온 사람의 생애를 능가할 별다른 생애는 없습니다. 천사들과 모든 지각 있는 사람들 앞에서 판단할지라도, “그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말을 듣는 그런 여자의 일생이야말로 마땅히 최대의 찬양을 들어 지당하며,“그 남자는 온전히 하나님을 따랐다”는 말을 듣는 그런 남자의 일생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생이라 말해주어 지당하다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에녹의 생애는 별다른 모험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사실이 하나의 놀라운 모험이 아닙니까?
영원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거하는 것 이상으로 고상한 사람의 존재를 드러낼 야망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에녹은 매우 특이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분명히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조용한 환경에 처했다.”
그러나 사실은 에녹이 그렇게 조용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살펴보십시오.
첫째로, 에녹은 여러 사람을 위한 대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담의 7세 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유명한 사람이었으며 그 당대 조상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족장은 점을 찍은 사람으로서 명예도 있지만 책임도 짊어지고 있는 존재였습니다. 옛 관습에 보면, 가족의 우두머리는 선지자며, 제사장이며, 또 그 가정의 왕입니다. 밖으로 나가서도 그가 지위도 있고 재산도 있는 사람일진대, 그는 상담자며, 행정관이며 통치자입니다. 에녹은 그 당시 위인이었습니다. 당시의 중대한 유지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녹은 당시의 경건한 길을 반대하던 불경건한 단체로부터 나오는 반대에 앞장서서 어려움도 받았었을 것으로 확신되어집니다. 그는 위대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는 목록 속에서 언급되었습니다. 혹자는 무모하게도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내야 조그마한 오두막집에 살고 있다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조용한 시골에 살고 있으면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고? 그러나 지금 나를 보시라고요. 나는 이렇게 대중을 위해 일하는 복잡한 사람이요. 나는 위임을 받은 자리에 올라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데요. 이렇게 되니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친구여, 에녹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도 그 당시 특이한 사람이요, 또 여러 가지 공중 일을 보아온 사람이지마는, 그는 하늘과의 거룩한 대화의 연줄을 잃지 아니했으며, 오히려 수세기를 두고 계속 거룩한 여생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다음, 에녹은 한 사람의 가족인이었다는 사실을 보십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더라”고 했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자녀가 많이 있으면 어디 그렇게 원대로 살 수 있나보죠. 나에게 당신이 하는 것처럼 기도하고 조용히 성경보라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도 어린 것들이 많이 따른 대가족을 거느린다면,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복잡한 가정 일이 얽히고설켜서 분명히 당신은 신경질을 내게 되고, 조용한 마음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저 숲속으로 물주전자와 밥을 싸가지고 은둔자의 오두막집에 들어가시면, 그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나처럼 가끔 바가지나 긁는 아내가 있고 자식새끼가 떼를 지어 밤낮 소란을 피우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 아내는 이렇게 외칩니다.
“만일 내가 홀몸이라고 하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내가 처녀 때는 헌신을 잘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경질을 잘 부리는 남편을 모시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만가지를 다 해 달라고 조르기만 하는 아이들을 두고 있으면서, 원대로 만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는 이 판에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다시 에녹으로 가 보면 그래도 동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에녹은 대중의 사람이요, 가족의 사람입니다마는, 300년 이상을 하나님과 동행했지 뭡니까? 그런즉 은둔자가 될 필요도 없으며, 또한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고자 하여 결혼생활을 마다할 것도 없습니다.
이외에 또 드릴 말씀은 에녹은 매우 악한 세대에 살았단 말입니다.
에녹은 죄가 온 세상을 뒤덮기 시작할 때에 나타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악했든지 그 죄 때문에 얼마 있지 아니해서 하나님이 온 지면에서 사람을 소멸해 버리게 되었습니다. 에녹은 조롱자와 멸시자들이 우글거리는 때에 살았습니다. 이 사실이 유다서에 기록된 대로 에녹의 예언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윗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유14~15)고 예언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때에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신앙고백한 사람들마저도, 사람의 딸들의 아첨에 타락해가고 있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교회와 나라는 결탁과 유행과 쾌락을 제기합니다. 이런 것들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타협이 시대의 규례가 되었습니다. 에녹은 장수가 끔찍한 죄인들만 만들어 내고, 끔찍한 죄인들은 하나님을 끔찍하게 노엽게 하고 있는 시대를 향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즉 오늘에 살고 있는 여러분도 여러 시대와 이웃과 주위 환경을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 가운데서도 여러분은 계속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증인의 임무를 짊어졌습니다.
“아담의 7세 손 에녹이 예언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조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영혼 안에는 불이 타고 있어서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에녹이 그렇게 했던 사실은 유다서의 본문을 통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유다서의 구절이 다루고 있는 대상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며,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는자”였습니다.
에녹은 그런 사람들을 일단 다루어야 했습니다. 그의 설교를 보면 그 에녹은 빗발치는 신성모독과 비난의 연발 속에 서서 사악한 사람들의 생애와 당시의 희롱하는 자들의 음탕한 언어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변호하는데 진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로 인함이라”(유14~15)고 했습니다. 이들은 에녹을 거스리는 말을 했고, 에녹의 증거를 거절했고, 에녹의 심령을 괴롭혔음이 분명합니다. 에녹은 그들이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을 거스리는 말을 하는 것을 슬퍼했습니다. 에녹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에 대해 말했습니다. 에녹은 사람들의 불경건한 사람들의 생애를 보고 그들에게 증인노릇을 했습니다. 에녹의 중요한 주제가 재림이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아주 가까이 살았던 사람들로서 손꼽히는 다른 두 사람, 곧 다니엘과 요한도 주님의 강림과 큰 심판의 날에 관해 많이 말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지금도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나는 앞으로 있을 심판과 하나님의 보좌에 앉을 권세자에 대해 많이 말한 바 있는 다니엘의 말을 인용하려고 하지는 않으며, 또한 주의 재림에 관해 말한 요한의 계속적인 증거를 다시 되풀이 하려 하지는 않겠습니다마는, 다만 나는 그의 열렬한 선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젠 여러분께서 에녹은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자임을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에녹은 여러분 대부분의 운명에 떨어질 문제를 두고 염려했던 사람임을 아울러 알게 될 것입니다. 에녹은 그런 증거의 일과 기타 모든 것을 다 연결시켜, 그 생명 다 할 때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가령 끝없이 무궁한 기쁨의 상태로 달려간 한 생명의 종말에 관해 말씀드리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 다하기까지 믿음 안에서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운데 행하여, 이젠 하나님과 맺은 그의 교통이 결단코 파괴되지 아니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Ⅲ. 다음 셋째 대지로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에녹의 동행의 종말은 어떠했느냐?는 것이 되겠습니다.

에녹은 그의 활동을 일찍이 끝마쳤다는 사실부터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우리보다도 더 빨리 여행해서 더 일찍이 본향에 들어갔는데, 이것은 우리는 어떤 때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또 어떤 때는 세상과 동행하면서 오락가락하고 있지만, 그의 생애는 분명히 훌륭한 전진적 동행만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녹의 향수 365년이 지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긴 생애였을지 모르나 에녹 당시에는 짧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살았던 몇몇 족장들은 거의 천년 세월을 살기도 했으니까요. 에녹의 생애를 다시 보통 있는 생애의 기간에 비하면 지금의 30년 또는 35년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사실 이 에녹의 생애를 가장 잘 드러낸 경우는 아마도 우리 주님의 생애일 것입니다. 에녹은 그 정도의 생만 살았습니다. 에녹 당시의 그토록 장구한 생애에 비하면 에녹의 생애란 지금 우리 생애와 비교된 주 예수의 생애의 길이와 꼭 같았습니다. 에녹은 비교적 청년으로 이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것은 이제 막 세상을 떠난 우리의 친애하던 형제 “비돈”장로가 그랬던 것과 같습니다.

“신의 총애를 받는 사람은 조사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여간 에녹과 이제 말씀드린 비돈은 크게 사랑 받던 사람입니다.(속담의 신의 총애는 이 사람들에게 해당되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총애를 받은 것만은 사실이겠습니다~역자 삽입). 이 거룩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임무를 아주 일찍 끝내버렸습니다. 그들은 평생의 과업을 부지런히 행했기 때문에 일찍 끝마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당신 집에 무슨 일거리를 맡겨보면 그 일을 가지고 온 종일, 어쩌면 온 주간을 소비하면서 매듭을 못 짓는 경우가 있지요. 확실히 그런 사람은 좀 더 오래 세상에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끝맺지 못한 많은 일을 해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녹과 같은 사람은 그의 일을 잘해냈습니다. 또 하나님과 긴밀하게 지내왔기에 그가 하루에 해야 할 일을 정오에 끝마치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에녹아, 이리오라. 네가 더 이상 천국 밖에 지체할 필요가 없다. 너는 너의 간증을 다 말했고 너의 살 삶을 다 살았도다. 모든 세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너를 전형적 사람으로 여기도다. 그러니 어서 본향에 와도 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밀을 필요 이상으로 들판에 두는 법이 없습니다. 밀이 익으면 하나님은 그 즉시 거두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본향에 갈 때쯤 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집으로 인도하십니다. 선한 사람이 젊어서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아직도 이 세상에 일찍이 익은 밀이 있고, 하나님의 성도로 그토록 빨리 성결된 분이 계셨음을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겠습니다.

그러나 에녹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사람들을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표현이기에, 나는 에녹을 죽은 것으로 말해 왔습니다마는, 사실 온 인류 중에서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고 저 하늘의 가나안 땅을 들어간 사람은 에녹과 기타 다른 한 사람 등 두 사람 밖에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에녹에 관해 듣기로는 “그가 있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입니다. “죽는다”는 말의 의미를 전멸이란 의미로 믿고 있는 신사양반들은, 그들 생각 나름대로 오늘 본문에 있는 “그가 있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이, 모든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적용했으면 하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데려감을 받은 형태에 있어서 어느 표현이 전멸을 의미하던 간에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가 있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은 그가 전멸해 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여하한 부드러운 표현도 전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은 말하자면, 그가 여기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는 땅에서 갔습니다. 그는 저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데려가 놓은 그곳입니다. 그는 과거에도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다만 죽음만을 맛보지 아니했을 뿐입니다. 그가 죽음을 피했다고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의 은총이었습니다. 혹자가 생각하듯 그것은 결단코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냐고요? 앞으로 죽지 않을 사람은 반드시 변화를 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변화를 받았습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다 변화하리라”(고전15:51)고 했습니다. 에녹의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변화를 체험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도 부활의 날에는 어차피 체험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비록 땅에 더 있지는 아니했지만, 땅의 동산에서 하늘의 낙원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아니 옮겨 심겨진 것입니다.
자, 이 세상에 결코 앞으로도 죽지 않을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올시다. 죽음이 아무런 맥을 못 추게 될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영화롭게 되는 사람이올시다. 비록 죽음의 철문을 통과하지만, 그 냉혹한 죽음이란 원수를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지상 생활을 하나님과 계속해서 교제하며 지냈던 사람이올시다. 죽음의 고통을 피하여 다른 길로 달아나지는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과 동행만 하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이기는 것이 있느냐?”(고전15:55)라고 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라고 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특이한 표현입니다. 아마 하나님은 이 일을 보이게 하셨습니다. 나는 조금도 의문시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사도들이 현장에서 본 것처럼 모든 족장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야 여하든, 거기에 어떤 특수한 휴거(들림)가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보좌로 이 택함 받은 사람의 들여 올라가는 일이 명백히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그가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다른 사람의 동경을 받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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