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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31]
 
 
 
     
 
 
 
작성일 : 13-11-21 15:20
스펄전 설교-창세기(1) 5.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205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창 4:9)

가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할 때에 그는 주제넘은 교만이 수치로운 지점에까지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만약 이 사실이 영감된 성경의 책장에 기록으로 남지 아니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데에도,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서도 그토록 교만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 라고, 거의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섭게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의 임재를 무시하기 때문에 흔히 생기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고 있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9)고 묻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건만 가인은 감히 그토록 냉정할 수 없이 무례하게도 하나님께 답하기를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반문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말의 내용을 이렇게도 풀이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벨이 자기 양을 지키듯 나도 아벨을 꼭 그렇게 지켜야만 한다고 하나님은 생각하십니까? 아벨이 양치는 사람이듯이 나도 양치는 사람입니까? 아벨이 자기의 절름발이 양을 간호하듯 나도 아벨을 그토록 간호해야 한단 말입니까요?”
가인의 차디찬 뻔뻔스러움은 결국 자기의 동생을 살인하기까지 그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그 뻔뻔스러움은 그와 같은 무서운 죄를 범하기에 이른 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만일 가인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먼저 버리지 아니하고, 또 하나님을 거부할 마음의 태세만 없었더라면, 피를 흘리기까지 이르는 저 잔악한 행동은 저지르지 아니했었을 것입니다. 살인죄를 범하자, 죄의 완악함이 가인의 정신에 박혀지게 되고, 이것이 강렬해지자, 그는 결국 자기 마음속에 느낀 것을 그대로 하나님 면전에 토해버리게 되어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말을 내놓기까지 뻔뻔스럽게 되고 만 것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법정에 나타난, 세상을 놀라게 한 죄수가 놀라울 정도로 잠잠해서, 여러 사람을 당황케 하던 사실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나는 아주 잔악한 살인행위를 저질렀음이 분명하다는, 그 사람에 관해 들은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는 아주 무죄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고소자들 앞에 너무도 잠잠하고 태연스럽게 서 있었습니다. 그런 태도는 정말 무죄한 사람이니 취할 수 있을 태도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때 느낀 것은 무죄한 사람이라도 이쯤 되면 잠잠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비록 무죄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고소를 당하는 처지가 되면, 자기에게 생기는 마음의 고뇌 때문에 잠잠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굉장한 범죄로 고소를 당하고 있는 사람이 얼굴을 두껍게, 철면피같이 서 있다는 것이 무죄의 증거가 되기는커녕, 그것이 오히려 고소를 당하고 있는 당사자에게는, 불리한 입장을 조성해서 그가 범죄했다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로, 현명한 사람에게는 판명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런 사람은 자기 손을 피에 담기는 것쯤에는 무감각하게 되어서, 조금도 동요되는 일이 없이 냉정을 찾는 것으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죄를 피합시다. 죄는 우리 마음에 끼치는 악한 영향을 위할 따름입니다. 죄는 마음에 독약입니다. 죄는 양심을 흐리게 하며, 양심을 상하게 하며, 양심을 잠자게 만듭니다. 죄는 판단을 흐리게 하며, 모든 기능을 말하자면, 술 취한 상태로 몰아넣어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우매한 용맹을 저지르게 하고, 우리를 무지한 주제넘은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쯤 되고 보면, 이젠 우리가 하나님 면전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도 서슴지 않고 행해냅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죄로 인해서 강철처럼 굳어지게 두들겨 맞고 있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우리로 당신의 은혜를 깨닫는 가운데 거하도록 매일 지켜주시옵시고, 당신의 말씀에 두려움 마음을 가지고 당신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게 도와주시옵기를 비옵나이다.

자, 이제 우리는 여기서 주시해 보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섭게 가인을 책망하고 있지만, 우리 자신도 그런 허물이 없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편견을 갖지 않고 실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내밀고 있는 갖가지 변명은 바로 곧 너무도 주제넘은 것들임을 알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의 죄로 인해 고소를 당하고 있을 때, 만일 우리가 그 죄를 부정하거나 경감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존전에서 뻔뻔스럽게 구는 것에 있어서는, 가인과 같은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데도 그것을 피하려고 하거나, 또는 불복종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한다면, 우리가 누구의 존전에 있는가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범한 죄로 나를 책망하고 계시는데, 나는 사악해져서 그것을 극구 부인하려고 해서 될까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한 의무를 수행할 것을 명령하고 계시는데, 내가 그 명령 수행을 주저하고 회의하며, 또 스스로 “내가 이것을 해야 될까? 하지 않아도 될까? 라고 문의하는 일이 과연 될 일입니까?

오, 이것이야 말로 너무도 대담한 반격이올시다! 반역의 요소는 복종하기를 주저하는 그 모든 주저함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반역의 요소는 이미 우리가 불복종했을 때, 우리의 과오를 경감시키려고 하는 모든 노력 속에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인을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감히 하나님과 상면할 수 없었던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디나 현존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서도 갖가지 죄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거스려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도 우리는 악을 행합니다. 우리가 나쁜 짓을 해놓고도 변명을 늘어놓거나, 명령받은 의무수행을 주저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바로 존전에서 불복종하고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코, 우리는 그러한 죄를 범해오고 있었던 만큼, 겸손히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이제 앞으로는 우리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일체 문제를 감히 제거하지 않도록 양심의 유순함을 허락해 주실 것을 간구해야 되겠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반대하는 그 밑바닥에도 분명히 이상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교만과 뻔뻔함이 들어 있습니다. 혹자들은 성경에서 취해오기 위해 성경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분명히 계시되어 있나를 알아보고서 그 다음엔 무엇이 꼭 그 성경에 있어야만 하느냐고 하는, 자기들의 기정관념에 따라 성경을 회의하고 판단하고 결론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 인간이여, 하나님께 반문하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그렇다 하시면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마냥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이해하실 수 없다고요?
그럼 꼭 이해를 해야 하겠다는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작은 손으로 바다를 잡을 수 있으며, 여러분의 작은 주먹으로 바람을 막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먼지 같은 미물입니다.
무한자는 여러분을 넘어 초월해 있음이 사실입니다. 영화로우신 하나님에 관해서는 언제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이해 못한다고 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회의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을 만드시고 여러분의 생명을 손에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 앞에 겸손히 머리를 숙이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들을소냐?”(출5:2)라고 바로처럼 감히 뻔뻔스럽게 말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옵시고, 또 가인처럼 여호와께 불경건한 교만으로 대답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우리는 가인이 한 말을 조용히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는 여호와께 이르기를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 질문을 생각하는 일에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비는 바입니다.

Ⅰ. 먼저 인간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자기 아우를 지키는 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가인의 그런 질문에 약간의 의미는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모든 거짓말에도 약간의 진리는 붙어있습니다. 최대로 불경건한 것에도 보통은 약간의 이모저모의 진리가 있습니다. 다만 슬프게도 그 진리가 이상하게 왜곡되고 뒤틀려 있기는 합니다마는, 자인의 이처럼 무례한 질문에도 약간의 고려점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떤 의미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자기 아우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겠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먼저, 모든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자기 자신의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올시다.
사람은 제각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임무가 있는데, 이것을 자기 어깨에서 남의 어깨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범에 순종하는 일은 반드시 개인적으로 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범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버지가 얼마나 거룩하든, 자기의 어머니가 얼마나 의롭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개개인은 친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자기 발로 서서 대답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들은 각자는 그 복음을 들은데 대한 자기 자신의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 외에 어느 누구도 자기를 위해 복음을 믿어 주거나, 자기를 위해 회개를 해 주거나, 자기를 위해 거듭나 주거나, 자기를 위해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각자는 제각기 개인적으로 죄를 회개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 개인적으로 회심을 해야 하며,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봉사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물대야는 그 자체의 밑바닥을 가지고 서야 하는 것이올시다.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그 경우에 되는대로, 소위 사제나 목사나 목회자에게 전가시키려는 헛된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마는, 그런 일은 결코 되지 않은 법입니다. 개개인으로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죄 짐을 십자가 밑에 갖다 놓고, 몸소 개인의 구주를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의 문제를 마치 여러분이 재산의 문제를 다루듯이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러분의 법정 대리인을 채용하듯이, 영혼문제를 두고 사제를 채용해서 문제 해결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탄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대속자와 변호인이 계십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하늘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 인간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러야 합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대신해 주지는 못합니다. 위대하신 우리 대왕께서는 개개인의 봉사를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봉사를 하기에 심한 고통도 받게 마련입니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의 책임을 지는 문제를 두고 생각할 때에, 어느 누구도 자기 아우를 지키는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적극적으로 얻어줄 수 없다는 것이올시다.
아니, 상대방이 불신상태로 있는 한, 자기 친구의 구원에 대해 소망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여, 우리는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 여러분들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구할 수는 있소마는,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까지도 여러분이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응답도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이름을 가슴 속에 품고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는 친구들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 매우 위대한 축복입니다. 아, 그렇지만 여러분들 자신들이 기도하지 않고서야 남의 기도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믿음으로 기도해 주는 사실을 얼마나 감사해야 마땅할지 모르나, 우리 스스로가 아직도 불신상태로 남아있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자, 우리는 다른 사람을 회심시킬 수 없었다고 해서, 우리가 할 수 없었던 일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고로 우리 아우가 예수를 영접하거나 환영하는 책임문제에 있어서는, 우리가 우리 아우를 지키는 자는 아닌 것입니다.

다음으로 드릴 말씀은, 이런 영적 문제에 있어서 타인을 위해 어떤 맹세나, 약속을 과감하게 털어 놓는 사람들은 매우 중대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겠습니다.
사실 상대방은 무척이나 무력한 상태에 있건만 이쪽에서 큰 소리치고 있는 판입니다. 아직 아무런 식별력도 없는 어린 꼬마를 두고서, 사람들이 엄숙한 약속을 보증해서 하는 말인즉, 이 어린 꼬마가 하나님의 모든 거룩한 계명을 잘 지킬 것이며, 그 어린 꼬마가 일평생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잘 지키는 가운데 살아갈 것이며, 그가 이 악한 현재 세상의 모든 허식과 헛된 것을 다 버릴 것이라고 하는, 약속 따위는 나에게는 언제나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이런 수수께끼를 이 세대의 전적인 무정함과 불경건으로 인해 되어진 것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어린 꼬마를 두고서 그런 약속을 한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무서울 정도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나는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실 이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짓 고백을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쳤다고 생각되는 거룩한 성전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자들로 돋보이게 하는 거룩한 예복을 입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 능력으로 굉장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하는 주착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무서운 진노로 내려다보고 계심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여러분들도 그런 굉장한 일을 해낼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여러분도 잘 아십니다. 여러분들도 모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스스로 이 세상의 허식과 헛된 것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모든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왔음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남들에게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거기 서서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기를 어린 꼬마가 꼭 8피트나 커야 할 것이며, 그 꼬마의 머리카락이 갈색을 띌 것이며, 꼬마의 눈이 푸른색을 가질 것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마치 기도서에 실린 것을 약속할 때와 같은, 그런 서약을 맺는 것처럼 막연한 것으로 여기나, 다만 이런 약속이야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런 약속 가운데서 내가 웃어넘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있다면 모든 것이 다 슬픈 일일 따름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런 말을 사용해서 감히 거짓말을 예배행위로 선포하고도,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 것이나 되는 것처럼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잇다는 이런 사실이 슬픈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지키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큰소리치는 약속을 내뱉은 무서운 위치에 처하지 마시기를 당부하는 바입니다.

아무리 열성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자라 할지라도, 자기 위치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인해 자기 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자기의 책임의 한계를 끌고 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적절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 열심 있는 사역자가 충실하게 복음을 전했건만, 그의 메시지가 거절을 당할 경우에도, 그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할 것이지 정죄하지 마십시오. 내가 수년 전에 나에게 주어진 사람들의 영혼을 구출하는 책임에 대해서 애써 생각하고 있었을 때, 나는 심적으로 심히 낙망했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때 생긴 시험으로 인해 나는 실망한 가운데 하던 일을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나는 책임감을 필히 갖고 있어야 함을 믿고 있습니다. 나는 불성실한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변명의 말씀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경우에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불성실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마침내는 남을 위한 선행의 힘마저도 멸해버리고 말았더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는 못했습니다. 내 마음엔 기쁨이 떠났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 앞에 복음을 신실하게 제시하고, 또 그 복음을 여러분에게 받아들일 것을 강하게 촉구했지만, 여러분이 이를 거절할 경우 나로서는 기도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이를 두고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열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축복을 보내달라고 기원하며, 또 여러분의 양심에 계속 탄원하고 촉구하여, 하나님과 여러분이 화목하게 지내기를 원했으나 내가 실패했을 경우에도, 나는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을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여러분의 돌 같은 마음을 돌이키고, 죽었던 죄인을 생명으로 깨우치게 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은 질 수 없었음을 알게 되었더란 말씀입니다. 조금도 과장할 것이 없이 우리의 책임이 중한 것만은 사실입니다마는, 우리는 사람의 보증인은 아닙니다. 우리가 신실하게 전했던 우리 구주님을 그들이 거절할 경우, 그들의 피는 그들 자신의 머리 위로 돌아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을 인해 항상 우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우리 주님의 심령에 기뻐도 하신 것이었습니다. 어떤 한 생각만이 배타적으로 우리의 정신을 온통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들의 실제생활에 좋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제한의 의미에서 다른 영혼을 지키는 자들은 아닙니다. 우리의 책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민감해서 우리 스스로를 반미친 상태로 불태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형제를 지키는 자라는 데에도 한 가지 의미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곧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미리 드리는 말씀을 나중에 가서 기억하실 것입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드린 말씀의 위력을 악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게를 더 증가시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께서는 내가 주제를 전반적으로 보고 있음을 아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Ⅱ. 지금 두 번째로 생각하려는 것은 높은 의미에 있어서 우리 각자는 우리 형제를 지키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들을 주시해 보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고 다르게 생각해서, 우리 자신을 냉정한 것으로 꽁꽁 싸놓고 “남들이야 어떻게 살아가든 내 알바가 아니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는 것은 그게 곧 가인의 정신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정신에서 멀리 떠납시다.

첫째로, 인간적 사랑에 대한 일반적 감정이 필히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모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영혼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평범한 인간적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친절을 의미하는 “인간적 사랑(애정)”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휴매니티올시다. 우리는 말하기를 그 사람은 인간적 감정조차 없다라고 말들 합니다. 하기는 나도 인간적 감정이란 그 말이 의미하는 것만큼, 언제나 그토록 고상한지 여부는 자신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저 넘어 있는 러시아나 터키의 휴매니티는 개발할 가치가 있는 한 송이 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는 그따위 휴매니티에서는 구출받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런 지역에서는 가장 무서운 짐승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불가리아의 휴매니티를 보십시오! 하나님, 그런 휴매니티에서는 구원해 주시기를 빕니다.
나는 지금도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에 일반적인 인간적 애정, 곧 휴매니티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의욕으로 인도한다는 표현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나는 확신합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밥 한술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여러분이 먹다 남은 한술의 밥이라도 기쁘게 나눠주실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된 여러분들은 생명의 양식이 없어서 멸망 받는 사람을 도무지 동정도 하지 않고, 돕지도 아니해서 결국 멸망하고 말도록 그냥 두실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추운 겨울 이 없어서 벌벌 떨고 있는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경우, 우리는 우리의 옷이라도 나누어 주어 그를 입도록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의의 옷이 없는 죄인을 보고도 그들을 흰 세마포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에 관해서, 그들에게 이야기해 줄 애타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사고로 인해 위험지경에 빠지면, 우리는 어디든 달려가서 갖가지 노력을 다해서, 할 수만 있다면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출하려고 합니다. 비록 위험에 처한 그 사람의 생명 정도야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멸망 받고 있는 때에도 우리가 무관심하다는 것은, 아니, 회개하지 아니한 죄인들에게 영원무궁토록 내릴 그 무서운 화를 보고도, 우리가 무관심한다는 것은 형제애적 동정심이 우리의 가심을 피해 달아나도록 행동하는 것이나 매한가지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나는 여러분들에게 촉구하는 바입니다. 여러분들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이며, 사람들은 모두가 다 여러분들의 형제들로서 같은 근원에서 나와서, 동일하신,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지붕 아래 살아간다는, 이와 같은 극히 저급한 동기에 근거해서 먼저 촉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께서 다른 사람의 영혼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각자는 자기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달라는 부탁이올시다.

두 번째로 주장하는 바는 우리는 모두, 특히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능력을 소유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동일한 은사를 가지거나 동일한 지위를 가지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나아만의 아내의 시중을 들던 보잘 것 없는 소녀가, 자기 주인의 병을 고칠 수 있었던 선지자에 관한 말을 들려줄 기회를 포착했던 것처럼, 여기 계시는 사람 중 아무리 초신자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선한 일을 행할 다소의 능력이라도 갖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제 방금 개심한 어린 아이라도 예수의 이름을 자기들의 아빠, 엄마들에게 이야기하고 그들을 축복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할 다소의 능력은 갖고 있습니다. 
자, 선을 행할 능력은 선을 행할 의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의 원리로 우리는 취합시다. 여러분이 어디에 계시든지 여러분이 한 사람을 축복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그 원리에 충실한 것입니다. 

능력을 가지고도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죄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친구를 위해서 능히 행할 수 있는 선에서 손을 뗄 경우, 여러분은 더도 말고 사랑의 법칙을 깨뜨린 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 관해서 죄인에게 말해 주어야 하는 특별한 소명을 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린 아기를 붙들고 그에게 구주님의 사랑을 들려주어야 하는 특별 소명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그토록 유익했던 것이, 여러분의 친구들에게도 유익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늘로부터 천사가 여러분에게 말해 준 계시를 원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지식, 여러분의 모든 체험, 은혜를 여러분이 받아 가진 모든 것은 다시 봉사의 형태로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되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지요, 그들이 선택을 받은 것은 모든 열방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에게 그 위대한 진리를 전해야 하는 일에 결코 관심을 기울일 줄 모르고, 자기들의 특수한 유익만을 위해 그 진리들을 받아 가진 것으로 공상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이기심이 생겨나서 이교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언급되자, 미칠 정도로 그들은 노발대발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원받은 여러분이시여,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은 순전히 여러분 자신의 특수 유익만을 위해 된 것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그런 은혜의 사실이 여러분에게 큰 유익입니다마는, 그러나 은혜는 마치 빛처럼 여러분에게 투여된 것입니다. 그것은 어두움에 있는 사람에게도 여러분이 그 빛을 비쳐주라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 은혜는 들에 있던 주님의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나눠 주시던 떡처럼 여러분에게 투여되었는데, 이것은 그 떡을 무리들 가운데서 떼서 모두가 실컷 먹고 배불리게 함이었던 것입니다.
자, 이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마시고 생각하시오. 즉 선행할 능력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선을 행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여러분은 어떤 능력이라도 지니고 있는 한,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여러분은 여러분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주장은 도덕적 율법에 대한 우리 주님의 해석에서 분명히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에 의하면 둘째 되는 큰 계명은 무엇이었습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극진히 사랑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함받기를 간구했으며, 또 실제로 사죄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이웃도 사랑하여 그가 자기 죄를 알아 역시 사죄를 구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생에 관해 우리의 최대관심을 둔다는 것은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진정 사랑한다고 한다면, 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멸시하며 구원을 거절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평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형제들이여, 우리는 아직도 표준에 결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소라도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들처럼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분명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형제를 지키는 자로 만드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바라보지 않고는, 우리 주님께서 도덕적 율법을 요약한 가운데 나타난 두 개의 큰 계명 중 첫 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막12:30)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형제의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갖지 아니하고는 이 계명을 능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만일 사람이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야 어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할소냐?”(요일4:20)라고 찔러 문의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서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선교 헌금 상자가 지나갈 때는 여러분의 눈은 못 본 척합니다. 여러분이 이교도들의 영혼에 무관하고야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에게 매혹을 느끼고 아름다운 체험을 가지는 것도 극히 좋기는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런던의 저 불쌍한 사람들이 구주에 대해 알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판인데,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 매혹을 느끼고 좋은 체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들을 죽어가도록 방치해 두며, 결국 무감각하게 저들을 지옥으로 떨어지게 그냥 두어버립니다. 이것이 될 말입니까?

하나님, 우리는 그런 단순한 경건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옛 박람회에서 전시된 생강 과자에 누렇게 색깔을 도금한 것이, 보기에는 무척 좋았으나 거기엔 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없는 종교는 아무런 쓸 데가 없습니다. 자기 친구를 사랑하되 그의 구원을 갈구할 만큼 사랑하지 않으며, 온 힘을 다해 이 구원에 일편단심 집중을 가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한다는 증거를 내보이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솔직 담백하게 나의 주장하는 바를 인정해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더 하나 제시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가장 위력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으로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모범이, 우리가 우리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는 방향에 다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비이기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달리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그에 대해 한 말이란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는 것 이외에 더 달리 무슨 말이 있었습니까?
이러한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을 위해 관심을 두시는 분이 계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주께서 그의 원수를 사랑하셔서, 그의 권위를 거역하는 사람을 구하러 여기 오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기주의적이라면, 아니 우리가 겨우 천국 가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뻐하는 사람을 주라고 부를지는 모르나, 아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예루살렘을 위해 우셨습니까?
여러분 자신만을 위해 흘리는 눈물일 뿐 남을 위한 눈물이 전연 없다면, 그런 눈물은 가련한 눈물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도 드리며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슬픔은 다른 사람의 영혼의 짐을 지므로 해서 생긴 것입니까?
또는 여러분은 겟세마네에서 우리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예수님처럼 슬퍼해 보셨습니까?

오, 우리가 우리 몸을 불사르는 데 넘겨준다 하더라도, 만일 우리가 인류를 향한 사랑이 없다면 그 행동 자체가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외형을 가지고 언제나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마는, 그 마음 자체가 인류에 대한 유익을 주자는 열망으로 따뜻해져 있지 아니하는 한, 우리는 예수님이 우두머리로 되어있는 공동체에서는 이방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나는 내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칭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기의 손을 들고 입을 열어, 불꽃 가운데서 타고 있는 사람을 재빠르게 꺼내오지 않거나, 또는 계속 잘못된 길로 달리고 있는 죄인을 구출하지 않고 있는 사람에게, 만일 그리스도가 여기 계신다면 무슨 말씀을 던져주셨을까요?
우리는 우리 형제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코 그리스도는 말씀하심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에게 떠오르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분명코 우리 형제를 지키는 직분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앞으로 이 형제를 지키는 직분에 대해 셈해야 하도록 불리움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특별히 오늘밤 선교에 관해 나에게 말해 줄 것을 요청해 온 젊은 대학생 여러분이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하시는 말씀, 곧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9)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코 듣고 착념하시기를 비는 바입니다.

혈육으로 긴밀하게 인연을 맺어 “형제”로 불리우는 사람부터 여러분은 먼저 책임을 지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들은 같은 양친부모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근친들입니다. 죤은 어디 있습니까?
토마스는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동생 헨리는 어디 있습니까?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왔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했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사람의 상태에 대해 얼마나 자주 진지하게 이야기해 주셨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사람을 가르치고 설복하고 죄를 확신시키기 위해 무슨 방편을 동원해서 사용했습니까?
사랑하는 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 자매님들이라고 해서 그냥 그런 책임이 없는 것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자매의 오빠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자매들께서는 남자 형제들이 가진 위력보다도 자매들의 형제에 대해 보다 큰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자매들의 오빠와 동생은 자매들의 말을 잘 듣는다는 말이올시다. 자매들도 오빠와 동생에 책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모친에게도 나는 부드럽게 문의하는 바입니다. 모친의 자녀들, 곧 아들딸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모친께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마는, 여러분은 사랑하는 자녀가 혹 멸망 받는다 하더라도, 그 자녀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부친에게 말합니다.
아들이 부친을 슬프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친께서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그 죄들을 아들에게 심어주는 데에, 부친께서 직접 영향을 끼치지 아니했다고 분명히 잘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 여러분은 부친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셨습니까?
가령 일주일이 지나 여러분의 아들의 몸이 공동묘지로 향하는 슬픈 장례 행렬을, 여러분이 따라가야만 하는 불운을 당했을 경우라 할지라도, 아버지된 아들의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진정 명백하게 깨끗합니까?
나는 여기 계시는 여러분을 통틀어 그냥 친척이라 합니다.
자 친척 여러분, 여러분은 친척의 피에 대해 깨끗하십니까?

내가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고 하니, 언젠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이 너무도 명백하게 내려질 날이 오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주위 사람이 죄 가운데 살며, 불신자나 부랑자가 되어 있는 것을 어쩔 수는 없지만, 그러나 여러분은 그 영혼을 생명과 평안의 길로 인도해서, 죄를 막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든 일을 해왔습니까? 나는 잠시 숨을 돌려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런 엄중한 질문을 개개인이 다 자기 가정으로 가져가보라는 것이겠습니다.
“사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격언이 있습니다마는, 확실히 기독교의 사랑은 바로 가정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가정이 청결하게 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안에 들어오는 많은 범위의 사람, 곧 우리의 친자녀들, 우리 집의 고용인들, 형제자매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왔었습니까?
나로 말씀드리면, 어떤 기독교 신자 어머니가 자기 자녀들을 그냥 남겨두고, 가정 이외 다른 곳에서만 선행을 하는 정신은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자기 집은 전연 무관심하면서 기타 다른 봉사하기에는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극성은 염려스럽습니다. 이런 경우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자기들에게 맡겨주신 귀여운 일곱 자녀에게는 별로 특별하게 관심을 두지 아니하면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나팔과 일곱인에 대해서 지대한 흥미를 가진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제발 그런 분들은 요한계시록 책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열게 하시고, 여러분은 여러분 슬하의 자녀들을 좀 관심 있게 보아 주십시오. 저녁마다 여러분의 아들들이 어디에 있는지 신경을 써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딸들로 하여금 적어도 복음을 알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비록 양친 부모들이 신앙 고백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구원의 계획에 전연 무지한 가정이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여러분의 아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딸, 누나, 아버지, 사촌은 어디 있습니까?
이제 곧 친척들의 구원을 간절히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단지 여기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형제지간은 그 범위가 굉장히 광범한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는 모든 족속, 모든 민족, 모든 조건의 사람들이 다 포함되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비록 자기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런던의 저 뒷골목에도 여러분의 아우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주막집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그나하게 술이 취했습니다.
친구여, 여러분은 저 주정뱅이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방향으로 이끌기에 무슨 일을 해오셨습니까?
여러분의 누이동생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누이동생은 밤거리를 배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배회하는 소녀를 보고 뒤로 주춤하면서 “그는 내 친 누이동생은 아니구나”라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소녀를 그냥 멸망 받게 방치해둔다면, 하나님은 그 소녀의 피를 바로 여러분 손에서 찾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소녀 누이동생을 옳은 길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오셨습니까?
그 소녀 누이동생은 비록 범죄는 했으나 마음만은 부드럽습니다. 우연히 그런 길에 들어선 많은 그리스도인 남녀들이 일종의 바리새주의로 자기들을 단장하고서, 마치 그들이 타락한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한 것으로 인해 더럽혀진 것으로 생각하여, 발에 먼지를 털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허물이 있는 자나, 범죄한 자라도 사랑은 주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데 대해 설명하도록 불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가장 사악한 사람에게까지 라도, 선행할 기회가 있는데도 그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우리에겐 허물이 있습니다. 런던에 계시는 여러분 가운데 돈 많은 사람들은 교외로 나가서 삽니다. 나는 여러분을 함부로 책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못 살라는 범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런 은혜의 혜택도 입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들끓고 있는 런던의 도심지를 떠나서, 여러분이 다만 복음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기고,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시름하고 있는 교회에게 여러분의 재산을 아까워 던지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은 어느 날인가 여러분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시중에 계시는 상인이여, 여러분의 재산을 벌어준 가난한 사람들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부자가 된 것은 결국 그들의 뼈와 근육으로 되었건만, 여러분은 그들이 마치 천벌이나 얻어맞은 사람으로 여겨 그들을 피해 버리며, 그들을 전적인 무지 속에 죽어가도록 방치하고 있는 그 불쌍한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오, 부자인 사람들이여, 여러분들은 책임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런던의 저 가난한 사람의 피가 대심판의 날에, 여러분들의 영혼에 배상을 청구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책임을 이행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렇고 말고입니다.
그러나 런던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니 이 영국이란 조그마한 섬이 모두는 아닙니다. 바다를 건너 저 인도를 보시라고요. 거기서도 역시 여러분과 동등한 인종이 살고 있습니다마는 딱한 일일세라. 이 순간에도 먹을 것이 없어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네 아우 힌두인들은 어디 있느냐?”
“네 아우 브라민인들은 어디 있느냐?”
“네 아우 순드라인들은 어디 있느냐?”고 문의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문의하실 때에 현장에 있어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무슨 대답을 하게 될까요?
선교사를 파송해서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수백만 사람을 구출해야 하는데도, 여기에 일전 한 푼 도움의 손을 펴지 아니한 부자 사람들은 과연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요?
어디 이곳뿐입니까?
중국도 있습니다. 중국에는 예수의 이름을 듣지도 못한 사람이 수백만 수천만이올시다. 그 숫자는 이루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운명을 하나님께 일단 일임합니다마는,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는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빛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의무가 단지 집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자기의 허리띠를 동여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는 인도의 피가 나의 옷자락에 흘러오지 않도록, 그리고 중국의 피가 내 머리 위에 저주를 퍼붓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온 인류에 대한 관계를 알게 허락하시고, 또 온 인류에게 한 형제의 임무를 수행하게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난하고 궁하면 궁할수록 우리에게 대한 그들의 요구도 크다는 사실이올시다.
그들의 요구는 계산서에 명확히 나와 있어서 여러분들도 잘 회상하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주로 엄밀하게 계산해 주어야 할 대상들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고 말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들은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가난하고 궁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바로 그들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느냐는 커다란 질문이 내려집니다. 그리하여 어느 다른 국가보다 더 무지한 국가가 있으면, 우리의 소명은 일차적으로 더 무지한 국가로 가야하며, 어떤 다른 사람보다 더 타락하고 낙망한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일차적으로 더 타락하고 낙망한 사람에게 특별한 관심을 표명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나는 우리 가운데 혹자는 자발적으로 우리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어 있지만, 그러나 가장 진지하게는 우리가 취하고 있는 직분에 의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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