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게시판
바이블25
크리스천라이프
커뮤니티
갤러리
성경/찬송가
지역정보
로중
전도
뉴스
QT
전도모음
Cristian YouTube
     
커뮤니티
칼럼
명언묵상이미지
하늘양식
오늘의책
십자가
명상
영상
설교
말씀
독자편지
독자편지 [107]
 
 
 
     
 
 
 
작성일 : 13-11-21 15:29
스펄전 설교-창세기(1) 17. 아브라함의 할례로 예시된 성별(창 17:1,2)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34  
“아브람의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창 17:1,2)

우리는 아브람의 소명과 결부된 그의 생애에 관한 설명부터 먼저 말했었습니다. 그 때의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나가 여호와께 속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분리된 존재자는 여호와께 속했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아브람의 칭의 문제로 넘어 왔습니다. 그때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긴 바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같은 주제를 좀 더 진전된 단계로 이끌고 가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런즉 여러분이 인내로 참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아브람이 하나님께 성별된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 속에서, 보다 완전하게 발전된 그의 경건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택한 본문의 장에서 우리는 아브람의 하나님께 대한 성별과, 봉사에 대한 그의 의향과, 주님께 적절히 사용되어질 그릇으로서의 순결을 보게 됩니다. 소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되며, 의롭게 된 모든 사람들은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 거룩해지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영화롭게 되는 경지에 이릅니다.

이런 축복들이 내려 온 순서부터 기억해 볼까요. 지금 우리가 거룩이니 또는 성별이니 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마는, 이런 일은 제1차적으로 제일 먼저 온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디딤돌에 의해서 나중에 이르게 된 하나의 상승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사람을 보자하니 그들은 성령님에 의해 부르심도 채 받기 전에, 거룩하게 성별된 체하는 것은 그야말로 헛된 일입니다. 인간의 육적 능력으로는 정당하게 하나님을 섬기기에 부족하다는 사실부터 먼저 배워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령님의 유효한 부르심에 의해 신령한 영적 생활로 들어오기 이전에는, 저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모든 말들이 여호수아의 말처럼 “너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노라”는 말로 일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지금 성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성별이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며, 또 이차적인 문제도 아닙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는 모든 참된 성결의 근원인 은혜를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결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의 꽃이지 하나의 뿌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결이 구원해 주지는 못하나, 구원이 성결하게는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은 자기의 거룩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나,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그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미 칭의를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 자라면, 더 이상 육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릅니다. 그는 은혜로 이미 받은바 축복의 능력을 가지고, 자기의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헌신합니다. 그런즉 천국의 축복을 받는 적절한 순서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성별은 소명과 칭의 다음에 오는 사건입니다.

아브람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나는 여러분에게 기억토록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의 믿음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신 이후로 1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건만, 우리가 성경을 고찰해 보아도 이 13년이란 세월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아브람의 생애에 있어서는 용감한 신앙과, 고상한 행동으로 메워지지 아니한 세월이었다는 점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사람들의 최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최선의 환경에 처했을 때, 그 사람들이 최선의 위치에 오른다는 진리는 참으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브람의 경우만을 우선 봅시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는 불신앙으로 인해서 그 약속을 우왕좌왕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몇 달 아니 며칠이 지나서 그는 불신앙적 위치에 떨어졌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의 바가지 긁는 충동에 견디다 못해, 약속한 후사를 얻을 목적으로 합당치 못한 수단 방법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자기에게는 그다지 악하다고 볼 수 없는 사단방법을 썼습니다. 물론 그가 쓴 수단방법이 현대인에게는 사악한 것입니다. 그가 쓴 수단방법은 불신앙적 계략에 의해 제시된 것이며, 또 온통 악덩어리였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갈을 아내로 취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에게 약속의 후사를 준다는 사실을 하나님에게 믿음으로 온통 맡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친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지를 못하고, 자기 스스로 좁은 길의 믿음을 떠나서 불확실한 방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도록 되어있는 최종 목적을 성취해 보자고 날뛴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16:2)(여종과 동침하여 자녀를 얻으라는 말)는 구절을 읽을 때에 아브람의 고상한 맛이 얼마나 깎여지는지 모릅니다! 하갈에 관련된 일은 족장의 깊은 불신뢰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관계된 것은 그에게나 그의 믿음엔 하등의 영예도 돌리지 못합니다. 그의 불신앙적인 처사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보십시오. 비참한 현실이 뒤따르고 말았습니다. 하갈이 자기의 여주인을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사래는 자기 남편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또 불쌍한 하갈 여종은 학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그는 집을 뛰쳐 달아났습니다.
“학대했다”(창16:6)는 말을 보면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브람과 같은 사람이 자기와 그런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을 함부로 집에서 도망가도록 방치해 두고서, 친절한 보호와 애정을 보여주지 아니했느냐고 못마땅히 여기고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의 신실함을 인해 매양 감사를 드리는 것은, 비록 성도의 결점이라도 그런 것들을 조금도 경감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사람의 사생활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실수들을 기록한 것은 “아브라함도 이렇고 이런 일을 했으니 우리도 해도 된다”라고 말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형제들이여,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선한 사람들의 생애가 하나의 실례들로서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의 법칙에 따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듯이 그들을 판단합니다. 아브람은 하갈을 아내로 맞이한 일과, 그녀를 학대하도록 방치한 일 등에 있어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여종의 아들이 주인 여자의 아들을 조롱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미와 아들 둘을 모두 다 추방해야만 했습니다. 아브람의 마음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말할 수도 없는 쓰라림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다소 완화하기는 했습니다마는, 일부다처제도는 결코 인정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방치해 둔 것뿐입니다. 일부다처제도는 악한 것입니다. 오직 악할 뿐입니다. 언제나 악한 것입니다. 가족 관계에서 자녀들에게 극도에 이른 비극을 안겨다 주는 것은 한 아내와 맺은 결혼관계의 순결성이 결핍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순결을 위장하고 있는 것부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에 의하면, 이 13년이란 세월 동안에는 아브람은 단 한번의 하나님의 방문도 받지 못했습니다. 아브람이 어떤 기억날 만한 일을 행했거나, 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단 한번의 접촉이라도 가졌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일단 단순한 신앙의 길을 버리고, 믿음이 인정하는 순결을 따라 행하기를 그친다면, 그땐 우리의 길에 가시를 뿌리며,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우리에게서부터 돌리도록 하는 것이며, 많은 슬픔으로 우리 자신을 찌르게 하는 사실임을 아브람의 경우를 통해서 배웁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지극히 큰 은혜를 보십시오. 아브람이 퇴보의 길에서 회복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아브람이 나이99세 때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더 친근한 방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한 계시록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네 입에서 너를 통하여 내치리라”(계3:15~16). 
굉장히 엄한 선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서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쇠약해지고 미지근한 무서운 상태에서 벗어나오는 데에는 별다른 치료책이 없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다정하게 접촉하시며 찾아오는 일 밖에 없습니다. 진실로 아브람에게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그의 불신적이고도 격리된 상태에서 이끌어 내어, 높은 위엄과 성결의 상태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아브람에게 나타내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아브람과 더불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두움에 처해도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나의 아침은 시작되도다.

여호와는 내 영혼의 빛나는 아침 별이요
여호와는 떠오르는 나의 태양이로다”

내 형제자매들이여,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의 이 가련하게 후퇴하며, 쇠약해지고 있는 영혼에 나타나 주시옵소서. 오, 주님이시여, 나를 소생시켜 주옵소서. 당신께서 한번 미소를 지어주시면 나의 광야의 황량한 꽃이 장미꽃으로 되올 것이옵니다.”
이렇게 은혜롭게 나타나 주신 경우를 당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위해 기꺼이 어떤 일을 행해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하신 일은 우리에게 놀랍고도 교훈적인 실례가 되는 것으로 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속받은 영혼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봉사하는데 바쳐 성별해야 한다는 실례인 것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먼저 여러분으로 하여금 성별된 생애의 모범을 주목케 하고,
둘째로는 그런 차원 높은 생애의 성격을 주목케 하고,
셋째로는 그런 생애의 결과를 유의하도록 하려고 합니다.

Ⅰ. 첫째로 아브람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거룩 또는 성별하게 된 생애의 모범을 봅시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사람이 하나님을 봉사하기 위해 철저하게 성별된 자가 되려면, 그는 먼저 하나님의 전능과 풍부와 영광을 인식해야 합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채우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모든 능력과 부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별스럽게 생각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별로 의뢰하지 않으며, 결국 별로 순종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아름다운 개념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주 철저하게 신뢰하게 되며, 아주 끈질기게 하나님을 섬기게 되어집니다. 어떤 행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죄는 그 근원이 하나님을 낮게 생각한데 있는 경우가 아주 허다합니다.
아브람의 죄만 두고 봅시다. 그는 사래가 늙어서 임신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인데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모든 열국의 조상이 되게 하셨는가를 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는 하갈과 관계하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엘사다이, 곧 지극히 풍성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나게 해 주던 것을 잊지 않고 생각했었더라면, 아마 다음과 같이 고백했었을 것입니다.
“안되지, 나는 사래에게 기대를 걸고 있어야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괴롭고, 구차한 수단 방법을 쓰지 않고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룩하실 수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족 풍부하시매, 따라서 피조물의 힘 따위에 의존하시지 않으신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인내를 가지고 소망하며, 조용히 참고 기다리겠노라.”
아브람처럼, 내 형제자매 여러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사업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도, 그가 하나님께서는 부족함이 없으니 그 모든 사업의 곤경도 잘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만 한다면, 그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업의 속임수를 쓰지 아니할 것이며, 또 상업인들 가운데 흔히 있는 기교에 들어가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비록 가난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풍부한 분깃이 됨을 믿는다면, 그는 부를 탐하거나 또는 자기의 형편을 두고 불만해 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영혼의 풍부한 분깃이 됨을 아는 사람은 쾌락을 찾아 헛된 것을 추구하지 아니할 것이며, 환락을 찾아 들뜬 무리와 어울려 행하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 하나님의 풍부함을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의 평안과 나의 기쁨에 조금도 부족이 없으신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셨구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한, 나는 만족하노라. 다른 사람이야 자기들 원하는 대로 깨어진 물통에서 물을 마실지 모르나, 나는 흘러넘치는 샘물 곁에 거하매 너무도 만족하노라.”
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지니고 계시는 영광스러운 이름들이 어떤 것들인가요?
잠시 동안이라도 여러분이 기억나는 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어느 것이나 한번 택해 보십시오. 그 이름은 여러분에게 부하고 의미심장한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여기 한 이름이 있습니다.
“엘 사다이”입니다. 즉 “엘”은 “강한 자”란 뜻입니다. 무한한 능력이 여호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나가기만 한다면, 연약한 우리라도 얼마나 쉽사리 곧 강해지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 “사다이”란 말은 “변함이 없는 무적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변함이 없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고, 또 누구에게도 돌아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엘”은 강하다는 것이며 “사다이”는 그 능력이 불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필요시에 강하시며,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기에 만전을 기하고 계시며, 모든 적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해 줄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이와 같으신 하나님과 더불어 나오십시오. 왜 여러분은 사악한 사람들이 말하는 번지르한 말을 듣기 위해 스스로 저자세를 취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장미꽃이라 해도 언제나 가시가 붙어있는 그 따위 세상 쾌락을 찾아 멀리 배회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금은을 믿거나, 또는 자기 육체의 힘을 믿거나, 혹은 달 아래 있는 것들에 의탁할 필요가 무엇입니까?
엘 사다이 하나님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게 되는 여러분의 능력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철저한 신앙을 가지고, 이 하나님은 영원히 여러분의 하나님이시며, 또 일상적인 분깃이시며, 부족이 없는 위로가 되신다는 즐거운 사실을 굳게 잡고 있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러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목자요, 인도자라는 것을 알았을진대, 죄악의 길로 들어가려고는 감히 절대로 앞으로도 생각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별된 생애의 모범을 따르기 위해 다음의 말씀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 앞에서 행하라.”
이것은 참된 거룩을 특징짓는 생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삶입니다.
아, 형제들이여, 아브람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사래 앞에서 행했었습니다. 그는 엉뚱하게도 사래의 견해와 소원을 부당하게스리 존경해 주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관계했을 때는 자기 자신의 안목과 자기 의향을 따라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호와께서 “내 앞에서 행하라”는 권고를 하시면서 부드럽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전에 하나님께서 족장에게 찾아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땐 말하자면 아브람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 어린 아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어린 아이에게 위로를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아브람에게는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가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권고도 실제적이고 활동적인 내용의 것이었습니다.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받았던 능력과 은혜를 나아가서 활용해야 합니다. 권고의 핵심은 마지막 말에 있습니다.
“내 앞에서 행하라.”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임재의식을 이해하며, 또는 옳은 일은 행하고 그릇된 일은 피해서,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끼며, 사적 및 공적인 모든 활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활동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심지어 기독교적 사회에 있어서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중요한 항목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들은 신적인 요소,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성을 빼버리고 있더라는 사실이올시다. 그것이 유감스럽습니다. 나는 조금도 사심 없이 모든 인류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신다면, 인류들의 행동과정은 지금과는 너무도 판이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신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의식에 의해서 스스로 억제하거나 자제할 줄을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죄벌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표는 이러합니다. 그는 어디 있든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골방에서 살며, 졸음도 없는 하나님의 눈이 자기를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행동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적으로 위대한 것을 동경한 나머지, 나쁜 짓이라도 행해보겠다는 따위의 욕구는 일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악한 친구와 짝을 해서 선한 일을 잊어버리는 예는 없습니다. 진정 성별된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강하게 죄를 거부하는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죄를 범해서는 안 되며, 또 감히 범할 수도 없노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인격을 지닌 자의 모범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알며,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임전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완전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이 말은 절대적인 완전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지상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해 질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는 혹자들의 신념을 두고, 나는 왈가왈부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성결의 모범은 완전한데 있다고 나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완전무결한 명령과 표준 외에 다른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법은, 절대적인 완전한 법외에는 달리 나올 수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모범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불완전해도 된다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이나 매한가지며, 따라서 우리에게 그 불완전한 사실에 대해 핑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선해라”는 따위의 규칙을 종들에게 주시지는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규칙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절대적인 규칙입니다. 그런 온전한 표준에 이른 사람이 누구입니까?
진실로 우리는 그런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르려고 목적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어린 꼬마 아들 녀석이 비록 글을 잘못 쓸 뿐만 아니라, 좋은 필기사의 소질이 없다 손치더라도, 그에게 아예 잘못된 불완전한 원본을 제시해 주기보다는, 그래도 완전한 원본을 제시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우리의 모범이 될 완전한 법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이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람처럼 우리의 얼굴을 숙이고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해 보면, 그런 완전에서는 너무도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갈구하는 것은 완전입니다. 결국은 완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율법을 우리의 연약에 맡겨 버리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리니, 우리는 그 율법의 완전함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아래 팔렸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완전에 이르는 것입니다.

신자들인 우리에게 반드시 즉시 이뤄졌으면 하는 유일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들을 완전케 하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일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신 일을 우리 안에 역사케 하는 것입니다.
“완전”이란 말은 내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똑바로”또는 “성실한”이란 일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내 앞에서 행하라. 그리고 성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일을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이나 사람과 밀접하게 관계한다 하면서 거리를 두고 지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선적인 신앙고백이나 거짓된 원리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유리처럼 투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조금도 간사한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양의 속임수이든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속임수를 미워하고 역겨워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신실성을 가지고 모든 것을 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대소간의 모든 일을 하는 가운데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시야에서처럼 다른 사람의 양심에도 자기를 천거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형제들이여, 여기에 성별된 삶의 모범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모범에 이르려고 갈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을 받은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갈구할 줄로 나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성별된 생활에 대한 여러분의 느낌이 나의 느낌과 같을진대, 그것은 곧 본문에 나오는 아브람의 느낌 그대로 일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다”(창17:3 참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미급한지 모릅니다. 어디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통 자족하신 분으로 늘 항상 생각해 오지는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불신해 왔단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저기서도 하나님을 의심해 왔습니다.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리라”(수1:5)는 약속을 단단히 믿는 자처럼 되어서, 이 세상에 일하러 나아가지는 못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난 받거나 또는 가난하게 되는 것으로 만족해하지도 못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의문이 없이 행하는 것을 족하게 여기지도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난을 자주 들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으며 여호와의 팔이 짧아졌느냐? 여호와의 귀가 무디어서 듣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들이여,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행하지를 아니했던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우리는 우리를 살피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느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식탁에서도 큰 소리가 나오며, 사업을 하는 데에도 부정이 있으며, 부주의와 세속적인 것과 교만이 있습니다. 악으로 인해 그날의 수고가 어떻게 망쳐졌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리고 밤에 돌아와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길 잃은 양처럼 탈선했습니다. 나는 나의 목자님의 임재를 잊어버렸습니다. 목자님께서 언제나 나를 보신다는 것을 느끼는 심정으로 나는 언제나 언행을 삼가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완전하지 못해 왔음이 사실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완전하다는 말을 하는 소리를 들을 때에 과연 쓴 웃음을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브람이 웃은 웃음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가소로운 웃음을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완전하다고 하는 그들은 우리와는 너무도 판이한 혈육에 속했거나, 아니면 너무나 지독한 바보가 되어 거짓되고, 자기 자신들을 전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거나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정 단 한 가지 행동이라도 주시해 본다면, 그 속에 오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며, 단 하루의 생활만 관찰해 본다해도, 그들이 미급하다는 것을 즉시 발견해 낼 것입니다. 비록 두드러진 어떤 범죄는 저지르지 아니했다해도, 그날 하루의 생활에 부족했던 일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 여러분이 따라야 할 모범을 찾으시고,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한 사도처럼 열심을 내어, 그 모범을 향해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Ⅱ. 둘째로, 본 장에서 나타난 이 성별의 본질을 보기로 합시다. 각 요점을 간단명료하게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진정한 영적인 성별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마음 가운데 아로새겨지며,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서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거리감은 언제나 죄를 의미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거룩한 친교를 가진다는 것은 거룩을 일으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욱 더 하나님의 이룩하신 일을 감상하게 되며, 더욱 더 하나님을 찬양하며, 더욱 더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며, 더욱 더 하나님과 더불어 계속 이야기하게 되며, 하나님께서도 여러분과 더불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이야기해 주시며, 결국 여러분은 하나님으로 인해 보다 철저한 성별로 나아가는 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별의 본질에서 또 다음으로 지적해 내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이니, 곧 이 성별은 은혜의 언약에 대한 넓은 관점에서 이룩된다는 것입니다.
계속 본문을 읽어 보십시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창17:4)
이런 말씀을 아브람에게 들려주신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해지는데 도움을 주고자한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거룩한 가운데서 성장하자면 사람은 반드시 언약에 관해 보다 많이 알고 있어야 하며, 자기 백성을 위해 그리스도와 맺으신 언약을 굳게 붙잡은 강한 믿음이 더 증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신”것입니다. 성경을 펴고 아브람이 언약에 대해 자기 개인적인 관심으로 인해 힘을 얻게 된 사실을 유의해 보십시오. 여기 나타난 제2인칭을 보시오. 그것이 어떻게 거듭 반복되고 있는가를 유의 검토해 보십시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다음 6,7절을 봅시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렇게 해서 아브람은 자기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내린 언약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언약 속에 참여해서 분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데에 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모든 섭리적인 언약에 대해 여러분의 관심이 투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의심만 가진다면, 이 의심은 숲속의 사나운 산돼지와 같아서, 마음의 정원에 펴 있는 성결의 꽃을 마구 짓밟아 놓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확고한 관심을 가지시기만 한다면, 포도밭에 노략질을 하던 여우놈들이 사냥을 당해 죽을 것이며, 이제 여러분의 아름다운 포도송이는 아름다운 향기를 발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강한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집에 분명히 기록된 것을 읽도록 하십시오.”
위대한 거룩은 위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뿌리며 순종은 가지올시다. 뿌리가 썩으면 가지는 번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것이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하십시오. 그런 사실을 아는 데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성별을 이루는 데에 물을 공급해 주는 샘의 원천을 발견하며, 또 그리스도의 봉사에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앙고백자는 이것이 사실이 아닌양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완전한 거룩에 이르기 위해 회의와 공포를 조장합니다. 나는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자기들이 마땅히 살아가야 할대로 살아오지 아니했음을 의식하고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들의 관심과 유익마저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올바른 삶을 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용납되겠느냐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들은 보다 만족스러운 성결한 생활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겸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좀 더 건강하기 위해서 스스로 굶어죽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창문 밖으로 금덩어리를 던져버려야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집을 더 튼튼히 세우기 위해서 집의 주춧돌을 빼버려야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믿는 자 여러분! 비록 그대가 죄인이며, 비록 그대가 타락자라도 계속 그리스도를 믿으시오. 죄책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믿는 그대의 신앙을 약화시키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때가 되매(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 죽으셨다”(롬5:7)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 십자가에만 굳게 매달리시오. 폭풍이 심하면 심할수록 여러분은 구명대를 더욱 더 필요로 하실 것입니다. 결코 구명대를 버리지 마십시오. 더욱 더 구명대를 굳게 잡으십시오. 그 보혈의 공로만 의지 하십시오. 그것만이 여러분의 죄를 없이하고 거룩 안에서 전진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마음속으로 “예수님은 나같은 죄인은 구원해 줄 수 없으시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와 표징이 어디 있단 말인고! 그러기만 한다면 나는 자신 있게 예수께 의탁하겠건만”이라고 말한다면, 그땐 여러분은 굉장한 위력을 지닌 여러분의 신앙을 버린 것이며, 여러분의 방패를 내던진 것입니다. 따라서 유혹자의 공격이 여러분을 겁나게 해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한 가닥의 은혜라도 있는지 없는지 문제가 생길 때라도, 여러분은 단지 예수에게만 붙어 있으십시오. 예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던 것은 여러분이 성별되거나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죄인된 여러분을 위하고, 죄인된 여러분을 그대로 구원해 주시고자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단순한 신앙을 결코 잃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죄를 이기고 주님의 사역에 합당한 인물이 되는 것은 오직 어린 양의 피로 인함이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여러 성경구절의 말씀을 읽으실 때에, 이 언약이 어떻게 아브람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이 한 역사로 계시되었는가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들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우리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라”
“내가 너에게 주리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 등등 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지를 가지고 “…하리라”“…필히 하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형제들이여, 먼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하리라”고 하신 것을 굳게 잡기 이전에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봉사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나의 구원이 이 가련하고 미약한 나의 팔에 의탁하고, 또 내 자신의 해결책과 내 자신의 정직성과, 내 자신의 성실성에 의존한다면, 그땐 나의 구원이 영원히 파선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영원한 구원이 우주를 지탱하시는 위대한 팔에 의존하고, 내 영혼의 안전이 역시 별들을 운행하는 그 손에 의존한다면, 그때는 하나님의 이름이 찬양하리니 나의 구원은 안전하고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나는 나의 온 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은혜롭게 역사해 주신 하나님을 위해 나를 바칠 것이며, 또 하나님께 사용되어질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못을 박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명백하게 인식되기를 위해 간구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성별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거나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시니라.”

더 나아가서 아브람은 그 언약이 영원한 언약임을 보았습니다. 나는 이 “영원한”이란 말이 언약과 관련해서 이전에도 사용되어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 장에서는 “영원한”이란 말이 거듭거듭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직 은혜면에 있어서 많은 갓난아기와 같은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놀라운 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은혜의 축복이란 오늘 주었다가 내일 도로 찾아가는 따위의 축복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은 우리가 그 구원에 신실하게 행동하는 동안의 불과 몇 시간만 우리에게 속했다가, 그 후엔 박탈당해서 결국 우리로 멸망을 받게 하는 따위의 구원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3:6).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겨 놓을 때에,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멸망의 고통을 받도록 방치해 놓은 의심스러운 구주에게 의탁한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탁한 구주님은 “내가 저희(양)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고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생명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끄는 성도의 안전구원이라는 딱딱한 교리 대신에, 여러분은 오히려 우리가 일단 받은 구원은 그대로 지속된다는 이 사실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마음속에 철저하게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참으로 거룩하게 의탁하며, 하나님께 불타는 정열로 감사를 드리게 되는 체험이 생깁니다. 이것이 곧 성별에 대한 최선의 자극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런 사상을 귀히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이 진정 은혜 속에서나, 또 그리스도에 대한 합당한 자로 성장코자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언약 속에 들어 있는 여러분의 개인적인 관심과 유익을 지각하시기를 힘쓰며, 또 이 언약의 성취를 보증하는 하나님의 능력도 지각하시고, 이 언약의 영원한 성격도 지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성별의 본질을 생각하면서 나는 다음 사실도 고찰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즉 하나님께 성별된 사람은 새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된 사실은 이름을 바꾸므로 나타냅니다.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부르지 말고 아브라함으로 부르라고 한 것입니다. 그의 아내도 더 이상 사래라 부르지 말고 사라로 부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성별의 뿌리와 근원은 중생에 있습니다.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새롭고 귀한 씨가 있습니다. 이 씨는 “영원히 살아서 거하는 씨”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 위에 놓여졌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도 아니요, 불의한 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이 성별의 본질은 할례의식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제시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봅시다.
우리가 여기서 신비로운 이 의식에 대해서 세부적인 것을 들어 설명한다는 것은 그다지 절실한 것이 아닌 줄로 알아 생략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할례의식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한다는 상징이란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바울의 골로새서에 보면 할례에 대한 바울의 해석이 나와 있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다음의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사람에게는 영원히 반드시 제거당해야 할 육체의 더러움이 있는데, 만일 이것을 제하지 아니하면 사람은 계속 불결하게 있을 것이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 밖에 있노라고 했습니다.
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그리스도에게 성결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어떤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오른 눈과 오른 팔처럼 애지중지하던 것일지라도 괴로운 포기를 감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반드시 육체의 애정과 정욕이 따른 육의 부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을 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봉사하자면 자기 부정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죽음의 선고를 통과하셔서 부패된 인간의 정욕과 관습을 절단하십니다. 육이 좋아하는 것을 멸해야 합니다. 육은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육을 증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와 관련해서 주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족속의 모든 남자에게는 필히 시행되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규정된 것으로써, 만약 이를 무시하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죄를 단념하고 육체의 더러운 것을 포기한다는 일은 모든 신자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거룩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유아라도, 아브라함처럼 수년을 더 앞서 영적인 것에 성숙하도록 되어있는 성인과 꼭같이, 육체의 더러운 몸 위에 기록된 죽음을 능히 식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안의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 하등의 구별이 없습니다.
“거룩을 떠나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가령 어떤 은혜가 있다고 하면서도, 그 은혜가 우리로부터 죄를 사랑하는 마음을 제거해 주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전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그런 따위의 은혜란 우리 자신의 헛된 육의 가상적인 기만일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세례의식은 할례의식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비록 이런 진술에 의문의 여지는 있지만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치더라도, 여기서 모든 신자에게 간곡히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자기 각자의 마음속에 이 할례와 세례의 신령한 의미를 인식하고서, 그 후에 외형적인 규례를 고려해 달라는 부탁이올시다. 어떤 상징으로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사건은 상징자체보다도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할례보다 더 많은 것을 제시해 줍니다. 할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나, 세례(침례)는 육체를 통째로 장사하는 것입니다. 세례(침례)는 “여기 제거해야 할 것이 조금 있구나”하는 식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백만 가지가 다 제거되어야 할 나쁜 것인 만큼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서 그리스도의 무덤 속에 반드시 장사되었다가, 다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실은, 우리는 죽음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으로 들어간다는 진리올시다.
노아의 방주처럼 옛 세상의 죽음을 통과해서 새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의 상징으로서 세례가 제시하는 것도 그런 것이올시다. 즉 세례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을 제시합니다.
베드로가 말한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고 했습니다.
세례를 통해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자기는 죽음을 통해 새 생명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는 성령님의 말씀을 따라 한 것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핵심은 영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장사되었으며, 그 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이 체험에 강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아브라함에게는 “내가 영적인 의미를 알아서 취했다면 구태여 외형적인 규례 따위는 행하지 아니해도 된다”라는 말을 하도록 허용되지는 아니했습니다. 할례는 세례보다도 더 꺼릴 만한 수많은 강한 이유들이 있는 만큼, 아브라함이 그런 할례는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을만도 했지만, 그는 의식이 의미하는 내용적인 영적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의식 자체도 일차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주저 없이 곧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즉 오늘 나도 형제자매 여러분에게 권유하고자하는 바가 있습니다. 세례가 상징하는 진리에 유의하심은 물론이거니와, 세례의 교훈에 온전히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진정 여러분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장사되었다가 살아났다면, 이 사실을 제시해 주시고 있는 외형적이고도, 교훈적인 상징을 무시하시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것은 당신의 견해에 하나의 난점을 던집니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본장에서 흔히 이런 논란이 나온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모든 자손에게 할례를 준 것 같이 우리도 우리의 모든 자녀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 상징을 고려하시고, 또 편견에 따르지 말고 해석해 보십시오. 그러나 성경에 따라 보시면서 해석하십시오. 할례의 상징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에 의해 상징된 모든 사람이 다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라는 추론을 낼 것입니다. 나는 그런 결론에 대해 트집을 잡지 아니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은 누구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9장 8절에서 이를 대답해 주고 있습니다.


 
 
 

 
Copyright(c) 2012 http://bible25.bible25.com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