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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01]
 
 
 
     
 
 
 
작성일 : 13-11-21 15:28
스펄전 설교-창세기(1) 16. 아브람의 의로 예시된 이신득의(창 15:6)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65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니라.”(창 15:6)

지난주일 아침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소명과, 또 그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분리된 삶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그의 믿음에 관해 말씀드린 것으로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의 소명을 생각하는 것에서 그의 칭의의 문제로 옮겨서 생각할까 합니다. 이 의롭다하심을 받은 사건이 소명 다음으로 중대한 그의 생애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또 이 칭의 문제는 신약에서도 핵심적인 신학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느니라”(롬8:30)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장을 오늘 주제의 서론으로 제시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즉 아브람이 소명을 받은 후에 그의 믿음은 가장 실제적인 종류의 믿음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친척과 본토를 스스로 떠나가라는 소명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세상을 염세한 자도 아니며, 고행주의적 버릇을 지닌 자도 아니며, 또는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전투에 어울리지 않는 가냘픈 감상주의자도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고상한 남자다운 모습으로 그는 자기에게 당도하는 가정적인 고충과 공적인 시련에 끄떡없이 견딜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내보였던 것입니다.
롯의 일군들이 아브라함의 종들과 다투었습니다. 아브람은 아무런 사심도 없이 자기의 어린 친척에게 목장지를 먼저 선택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는 그 땅에서는 가장 좋은 소돔의 물이 많은 평지를 포기했습니다. 조금 후에 자기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 훌륭한 노인은 당당한 군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며, 무서운 적에 대항해서 훌륭하게 전투해 보였습니다. 아브람은 자기 집의 종을 모으고 이웃의 협조를 요청해서, 동맹한 왕들의 대군을 추격해서 강한 손으로 그들을 무찔렀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이 마치 소년시절부터 군인으로나 있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이런 일상생활 속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의 믿음입니다. 혹자는 구원신앙은 어떤 추상적인 전제들의 진리를 희미하게 믿는 것이며, 따라서 어떤 황홀한 주제를 조용하게 생각할 뿐이거나, 아니면 우리 동료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일체 나타내지 않고, 그런 것과는 단절된 채로 있는 것인 양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신앙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종교적인 행습에 그치고마는 신앙은 기독교인의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모든 것에서 스스로 나타내 보여져야 합니다. 단지 종교적인 신앙을 택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따뜻한 심정보다는 머리를 위주로 하며, 시장에서보다는 반드시 조용한 수도원에서나 통하는 신앙을 가지고 가냘프게 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개발하시는 용감무쌍한 신앙은, 우리들이 한 주간 살아가는 일상생활에 적용되는 아름다운 실제적인 원리가 되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가정을 다루며, 시장의 도매상이나, 농장이나, 또는 거래소와 같은 일상생활 전선에서 만나는 생의 험악한 투쟁에 과감하게 들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설교의 서두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마는, 그렇게 한 것은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소명에 이른 믿음인 것같이, 또한 그의 칭의 속에 빛나는 믿음으로서 하나님은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처음 구절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이 있습니다. 아브람과 같은 신자도 위로가 필요했더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이 왜 두려워했겠습니까?
그것은 전투가 끝난 후 언제나 격조된 흥분에 의해 생기는 그 후의 반응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용감히 싸워서 멋지게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겁쟁이들은 전투하기 전에 떨고 용감한 자들은 승리한 후에 떱니다.
엘리야는 겁도 없이 바알의 제사장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이 끝난 후 오히려 그는 마음이 가라앉고, 두려워 이세벨의 낯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아브람의 두려움도 하나님 앞에서의 위압적인 경외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능력으로 그에게 임하자, 그는 요한과 다니엘이 느꼈던 것과 같은 마음의 위축됨을 느꼈던 것입니다.
가령, 능력의 말씀이 임하자 사랑하던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의 발에 엎드렸으며, 다니엘은 힛데겔 언덕에서 자기는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족장 아브람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의 심정은 아주 저하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종을 높이 들어 거룩한 하나님과의 친교를 능력껏 활용하는 경지로 이끌었습니다.

아, 형제들이여, 이것이야말로 복스러운 두려움입니다. 우리도 그런 두려움을 가집시다. 이 두려움이 온전한 사랑에 의해 제거되기까지 이런 두려움을 가집시다. 온전한 사랑이 보다 좋은 것은즉, 이제 그런 두려움을 이 온전한 사랑으로 대치합시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일단 이 선한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족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을 안 사람으로서 영화로우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광을 누리고서도, 자기 자신의 판단에 비추어 다소라도 낮아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아브람이 위로를 받았을 때에, 그는 그의 칭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오늘의 본문은 아브람이 그 전에는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노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그것이 존재할 때마다 언제나 의롭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작용하는 순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즉각적으로 따라 옵니다. 믿음의 결과는 몇 달을 질질 끌면서 시간을 보낸 후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순간 그는 의롭게 됩니다. 의롭다하심을 얻은 사람이건만 그래도 자기들의 행복한 상태를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칭의의 축복이 과연 우수하고도 풍성한 특권으로 나타나 있지를 않습니다. 나는 여기 계시는 여러분 가운데는,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어두움에서 놀라운 빛으로 나아가서 예수를 바라보게 되었으며, 죄의 용서도 받은 것으로 믿고 있는 자도 있습니다마는, 아직도 그런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한 탓으로 인하여, 이하의 여러 말씀의 아름다운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해지다.”
“하나님 안에서 이루다.”는 말의 뜻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현재에 분명코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비록 여러분께서 의롭다하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하더라도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께서 하나님에게 용납된 사실을 알지 못한다해도, 그래도 여러분은 하나님께 용납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그 온전한 풍성에 비하면 개인적으로 불완전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재산의 소유권 대장을 읽어볼 수 없거나, 또는 아직 소유권 대장이 있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속한 재산은 그대로 자기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법이 그렇게 권리와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언제인가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칭의 사실을 분명코 인식할 때가옵니다. 그때는 칭의 사실을 여러분이 지적으로 알게 될 것이며, 또 확고한 보조를 취해 행하면서 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며, 부푼 가슴으로 승리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대로 다음 세 가지 문제를 고찰할까 합니다.
첫째로, 아브람의 칭의의 방법,
둘째로, 그를 의롭게 한 믿음이 목적한 대상,
그 다음 셋째로, 그의 칭의의 결과입니다.

Ⅰ. 형제들이여, 첫째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어떻게 칭의를 받게 되었습니까?

바울도 로마서 4장에서 명백하게 제시한 바 있지만, 아브람은 자기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이 위대한 진리를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행한 선한 행위가 많이 있기는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기 본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도 선행입니다. 고상한 정신을 가지고 롯을 떠난 것도 선행입니다. 대담무쌍한 용기를 가지고 침입한 왕들을 추격한 것도 선행입니다. 소돔의 전리품을 취하지 아니하고, 그 손을 하나님께 들어 소돔왕으로부터는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취하지 아니했음을 보여, 온전히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렸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행위였습니다. 자기가 소유한 것 중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치고, 지극히 높으신 자를 경배했다는 것은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행위들이 본문엔 일체 언급되지도 아니했거니와, 또 그가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얻게 된 사실에 대해 그런 행위들이 칭의의 기초나 원인, 또는 부분적인 원인이라도 되는 것으로서 여겨져서, 거룩한 의무로 제시되는 암시마저도 일체 없더라는 사실입니다. 없습니다. 다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분명히 그렇습니다. 수년 동안을 그처럼 거룩하게 생활해온 아브람도 자기의 행위로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가 없고, 다만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 존전에 용납을 받은 사람일진대, 하물며 의롭지 못하게 살다가 결국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야, 더욱 더 믿음에 근거해서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게 마련입니다. 
죽어가고 있던 강도, 또 그와 같은 기타 여러 사람에게 구원이 있을진대, 그 구원은 삯으로 된 것이 아니요, 순전히 은혜로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선행이란 일체 없었으니 말입니다. 온통 선행으로 꽉 차 있는 아브람마저도 그런 선행에 의해 칭의를 받았을 수 없고, 다만 믿음에 의했을진대, 하물며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우리야 더욱 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해 칭의를 받고,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자비로 구원을 받도록 간구하여, 하늘의 은혜의 보좌에 가야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더 나아가 봅시다. 아브람에게 칭의가 온 것은 도덕적 규칙에 일치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온 것은 아니거니와, 예식적인 규칙에 성공했다고 해서 온 것은 더욱 더 아니었습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너무도 명백히 밝혀주고 있지만, 아브람은 그가 할례받기 이전에 벌써 의롭다 함을 얻었던 것입니다. 예식적인 것을 가지고는 외형적이고도 가시적인 언약에로의 첫 발도 내디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완전히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예식적인 것을 따르는 것은 무엇이나 이미 완전해진 것에다가, 아무것도 더 보탤 수 없습니다. 이미 칭의를 얻었던 아브람은 그 칭의를 자기의 행한 할례에 돌리지 아니했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과 내가 칭의를 받았을진대, 다음 두 가지 사실은 너무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즉 이 칭의는 도덕적 법칙의 행위로 된 것도 아니며, 또 어떤 예식적 법칙에 순종하므로 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예식이 가령 아론에게 주어진 거룩한 규례이든, 또는 기독교 교회 안에 점차적인 전통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 보이는 미신적인 규례이든, 일체 그런 것으로 칭의를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로 신실한 아브라함의 자녀이며, 아브라함의 방법대로 칭의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 칭의는 어떤 종류의 규례나 예식에 순종함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존전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여러분이실진대, 다음 말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례 그 자체는 훌륭한 규례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도 없거니와, 또 우리를 의롭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지도 못합니다. 교회 입교식 같은 것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공상에 불과해서, 그것이 비록 하나님에 의해 명해진 것이라 할지라도, 칭의에는 도움이 없습니다. 주의 만찬도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예식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용납 받게 하거나, 또는 의를 얻게 하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아브람은 자기가 의탁할 아무런 예식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나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 있기를 원하기만 하면 역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가 있습니다. 아브람의 이번 경우의 믿음은 자기가 의롭다함을 얻는 데 있어서, 유일하고도 전적으로 그것만의 전부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다음 사실을 주목해 봅시다.
즉 다른 경우에 있어서의 아브람의 믿음은 행위로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비록 어느 경우든 믿음이 순수할 때는 언제나 그 믿음이 선행을 수반했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과 같은 특종의 믿음의 예는 아무런 행위도 수반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별이 비치는 하늘 아래로 데리고 가서 쳐다보라고 명했습니다. 거룩한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네 후손이 저 별과 같으리라”(창15:5 참조)는 것입니다.
그 때 아브람이 무엇을 했습니까?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가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니라”(창15:6)는 말씀이 즉시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것은, 그가 제사를 드리기 전이었으며, 거룩한 말을 하거나 단 하나의 어떤 행위도 하기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언제나 행위를 수반한다는 진리와, 또 믿음과 행함이 합동하여 사람을 의롭게 만든다는 거짓과를 항상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 믿음이 진정 진실된 것이라면, 그런 믿음은 생활의 거룩을 항상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조금이라도 우리 생활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거룩한 약속을 우리가 믿은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영감 받은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2~25)

나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주목하셔야 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람을 의롭게 했던 그 믿음이 비록 그를 완전하게, 의롭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불완전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전에도 불완전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명령해서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창12:13)고 시켰습니다. 칭의를 받은 후에도 아직 그의 믿음은 불완전했습니다. 다음 장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자기의 하녀 하갈을 취해서 거룩한 목적을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완전히 믿지 아니했음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데에 완전무결한 믿음까지는 필요치 않고, 적은 믿음만으로도 족하다는 사실은, 여러분과 나에게 있어서는 그것도 하나의 축복이올시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마17:20)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오직 작은 어린 아이의 믿음만이라도 갖고 있으면 그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해 줍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아브람 족장의 믿음과 같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브람 족장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데에는 조금도 불신앙이 없었으며, 동요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그의 믿음과 같은 수준에 비록 이르지는 못했을지 모르나, 그래도 그 믿음이 단순하고 진실하며,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단단히 신뢰하는 것이기만 하다면, 그 믿음이 보다 강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저 불행한 것만은 아닙니다. 마땅히 여러분은 “주여, 나의 믿음을 더 해 주소서”라고 매일 기도하셔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그 적은 믿음이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을 의롭게 해 줍니다.
약그릇을 입으로 들고 가는 손은 비록 떨고 있지만, 손이 약하다고 해서 약효를 줄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행위로 인하거나, 예식으로 인하거나, 일부는 행위, 일부는 믿음으로 인하거나, 또는 그의 흠없는 완전무결한 믿음으로 인해서 의롭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람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부족하나마 단순한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얻은 것입니다.

사실을 보다 면밀히 검토해 본즉, 이 본문은 나에게 너무도 관련이 깊어, 지금 이 순간을 당해 나는 이 본문을 두고서 논쟁이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임을 솔직히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들은 대로 이 믿음이 우리로 의롭게 한다고 했지만, 믿음 자체가 공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믿음 자체를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으로 대치할 만한 공로를 지니지 못합니다. 또한 믿음은 그러한 순종의 대치물로 여겨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믿음이 그런 공로가 될 수 없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선한 일은 하나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의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믿는다는 것은 결국 믿는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믿은 사람이라고 봅시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사람일망정 마땅히 순종해야 할 일부분만을 하나님께 한 것에 불과합니다. 만일 그가 사랑이나 경외나 기타 어떤 다른 일에 있어서 실패를 했을 경우, 그의 믿음이 하나의 미덕과 행위로서 그의 부족을 대신해서 세워주지는 못합니다. 사실, 신약의 위대한 원리에 의하면, 하나의 행위로서의 믿음이라면, 그런 믿음은 사람을 의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는 전엔 어떤 행위로는 구원받지 아니했습니다. 조금도 행위로는 구원받지 아니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단지 은혜로 된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그 방법마저도 그 자체로는 전연 하나의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행위로는 구원받지 아니했음이 사실입니다.

믿음이 그 자체로 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자아에서 눈을 돌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곧 믿음의 본질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의 믿음은 나의 의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자기의 믿음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그리스도만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전연 참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의 구속과 그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믿음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 그 자체가 우리의 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복음의 핵심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나는 봅니다. 그것은 곧 일단 성도에게 내려 준 믿음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전가된 의를 무시하며, 조롱하는 어떤 이단자들을 대항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칭의를 받으며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해서 자신이 있었고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서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오늘 아침 우리가 본문으로 택한 구약성경 구절은 우리에게 말하자면 단지 칭의의 외형적인 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칭의는 믿음에 의해 우리에게 와 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 규정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믿음을 사람에게 의로 돌립니다. 그러나 구약이 우리에게 아주 명백하게 말해주지 않고 있는, 저변에 흐르고 있는 은밀한 진리는, 신약에서 선포된 가운데서 발견되어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인해 하나님께 용납되고, 또 칭의를 받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의롭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 자체로는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의롭게 하는 것은 단지 그 믿음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8)
베드로 후서의 구절도 역시 같은 효과를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거기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1:1).
원문에 익숙하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라는 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속한 의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의 의 올시다. 우리 구주님은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의가 되신” 분이십니다. 메시야에 관한 옛 예언적 칭호의 아름다움은 “주 우리의 의”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오늘 아침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돌려주신 의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이 교리에 대해 논의할 때가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는 바가 있습니다. 믿음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은혜나 미덕이 되어서, 어느 사람의 의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본문이 의미해 주지 않고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그 손 안에 그리스도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믿음이 우리에게 의로 여기신바 된 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일에 믿음이 안착하며, 또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대속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사람을 의인으로 봅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 자신 안에 있는 인격으로 인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격으로 인한 것입니다. 믿는 자도 수천가지 죄를 범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삼손처럼 괴로운 범죄를 저질렀을 것입니다.
입다처럼 어두운 가운데 행했을 것입니다.
다윗처럼 실수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노아처럼 녹아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이 있다면, 그는 의인 가운데 이름이 기록되며, 하나님이 그를 용납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믿는 자들의 실수를 못마땅하게 바라볼지 모르나, 하나님은 믿는 자들의 가슴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순수한 믿음의 보석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소원과 마음의 상태와 할 수만 있었으면 행했을 가능성의 일들을 보시고 그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죄를 속죄의 보혈로 덮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의 의를 지닌 저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의인의 징표인 믿음을 보십니다. 그 징표가 어디에 있든지 그것만 보십니다.

Ⅱ. 이제 우리는 아브람이 칭의를 받았을 때의 그의 믿음이 의지했던 약속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믿음과 같이 아브람의 믿음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약속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4~5).
만일 이 약속을 어떤 다른 사람이 말했더라면, 그 약속은 족장에게 한갖 우스꽝스러운 것에 지나지 아니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하나님에게서 직접 말씀해진 것이기 때문에, 아브람은 그것을 받아들고 또 신뢰했던 것입니다.
자, 형제들이여, 여러분과 나도 그런 진실된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16:16)라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이런 약속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만일 이런 선언이 로마교회의 제사장에 의해서 우리에게 내려진 것이거나, 또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권위에 입각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진실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언의 약속이 거룩한 말씀에 기록되어져서 우리에게 왔으며,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거기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사실을 말하기는 간단하지만 우리가 특별히 유의해야 할 사항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믿는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 진리를 사실이라고 선언한 사실에 기초해야 하지, 그렇지 않고 이름 있는 목사나, 또는 아주 존경받는 사람들의 웅변이나 설득에 기초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여러분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람을 믿는 믿음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을 믿는 믿음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올시다. 이런 사실을 유의하시고, 여러분의 신앙을 다시 한 번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아브람의 믿음은 후사에 관한 약속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이런 후사에 관한 약속은 전에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의 축복이 될 후손을 주겠다고 벌써 언급했습니다. 그는 낙원의 문에서 하와에게 내려주었던 동일한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창3:15)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의 날을 보고 기뻐했노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 가운데서 아브람은 한 후손을 보았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사도가 말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람과 그 자손에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람은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 다음 그는 믿음의 조상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믿을 많은 우리들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의롭게 하는 믿음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와 관계된 것이지, 단순히 추상적인 진리에 관계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단순히 이런 교리만을 믿는다면, 교리가 여러분을 구원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믿음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에게 화목케 이끄신 그리스도 안에 계심을 믿을 때에,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육을 입으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전적인 신뢰로 그 하나님을 믿을 때에, 그 때의 믿음이 여러분을 의롭게 합니다. 그것은 아브람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까? 그리스도와 관계하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믿음입니까?

아브람은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성취될 수 있는 약속을 믿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한 아기가 자기에게서 출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의 100세가 되었습니다. 사라도 이젠 임신할 수 없도록 경수가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아브람의 몸은 말하자면 죽은 거나 같습니다. 사라도 임신 출산하는 경우를 두고 말한다면 역시 죽은 거나 같습니다. 아들을 출산한다는 이 사건은 그야말로 자연법칙을 번복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런 일들을 생각지 아니하고 옆으로 제쳐 놓았습니다. 그는 피조물인 자기 위에 기록된 죽음을 보았습니다마는, 그러나 창조주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믿음은 반드시 그와 같은 종류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나는 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나의 가장 거룩한 해결책에서 나온 최선의 소망에도 절대적인 죽음만이 기록되어 있는 장면을 나는 볼 따름입니다.
“내 안에 아무 선한 것이 없도다.”
이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율법 아래서 죽었습니다. 나는 나의 육적 타락으로 인해 부패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의 생명을 통해서 살 것과 약속의 축복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에 은혜가 넘치고 구원의 증거가 충만할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적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많은 죄 가운데서와, 또 양심의 고발을 많이 받으면서도, 굳건히 예수를 신뢰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믿음이올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다시 말하면, 경건한 자들만이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들까지도 의롭다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롬4:5), 그리스도를 성도들의 구주로 믿지 않고 죄인들 구주로 믿는 신앙,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에게 함께 하시는 대언자 곧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 이런 신앙이야말로 고귀한 신앙이며, 또 우리에게 의를 돌려주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 칭의하는 믿음은 광대하고도 고상한 놀라운 약속을 다루는 신앙입니다.
나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 서서 저 무수한 천체를 바라보고 있는 족장을 상상해 봅니다. 그는 수많은 별들을 다 셈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브람의 외부로 바라보는 눈은 겨우 갈대아 땅에서 밤중에 별을 바라보는 일에만 오래 익숙해 왔으나, 지금 그에게 나타난 별의 수효는 평범한 관찰자가 보는 것 그 이상으로 많았습니다. 점점 놀라운 눈초리로 보고 있는데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이시여, 만일 내가 한 부족의 조상, 한 족속의 족장만 되어도 만족할 것인데, 무수한 사람들의 무리가 내 몸에서 나온다니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라고는 말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대로 약속을 믿은 것뿐입니다. 그는 그 약속이 확고한 것으로 그냥 믿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진실이기에는 너무 과분한 일입니다”라고 아브람이 하는 말소리를 나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다고 말씀하신 이상에는 아무것도 하나님이 행하시기에 과분한 것이 없습니다. 약속의 은혜가 크면 클수록 그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고 완전한 선물은 빛의 아버지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그토록 광대하고 높고 깊고 넓은 약속을 취할 수 있는 믿음입니까?
비록 여러분은 한 사람의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요, 아들이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연합된 상속자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극한 기쁨을 지닌 천국이 여러분의 것이며, 모든 영광의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오, 이런 믿음이야말로 의롭게 하는 믿음이요, 또 멀리 나아가서 넓게 쟁취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야 말로 약속의 말씀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도 보다 더 이런 확대된 믿음을 가지게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내린 약속도 믿는 신앙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자기에게서 한 후손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온 세상이 복을 받는 것은 바로 그 후손 안에서 되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 관한 모든 약속은 믿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나의 절친한 친구에 관해 내린 약속에 대해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약속이 여러분 자신에 대한 약속으로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관계되어진 약속일 경우에는 여러분에게는 난점이 있습니다(남의 약속은 잘 믿어도 여러분에게 내린 약속에 대해서는 여러분 개개인 각자가 극히 회의적입니다).
나의 체험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나는 내 친구가 여러 가지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보고서도 하나님이 내 친구를 버리지 아니하실 것을 믿습니다. 나는 성도의 자서전도 읽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종이 불 가운데나 물 가운데를 지나가더라도, 조금도 다치지 않게 구해 주시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내게 닥쳐오면 그땐 의심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내 자신의 문제를 두고서 내 마음이 외치는 부르짖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떻게 나에게도 그런 훌륭한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내가 다 무엇이며, 내 조상의 집이 다 무엇인데 그런 자비를 내가 받을 수 있단 말인고?
나는 죄씻음 받아서 지금 눈보다도 더 희게 되었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참으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서 의롭게 되었으며, 그것도 완전히 의롭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글쎄! 나에게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그리고 다함이 없는 샘에서 흘러오는 사랑의 물줄기가 내려온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나! 나에게도 이생에서 특별한 섭리로 보호를 받고 내생에서 준비된 천국의 복락을 누리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에게도 악기가 있고, 면류관이 있고, 종려가지가 있고, 보좌가 있단 말인가!
나에게도 예수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와 같이 되어 그와 더불어 통치하는 지극한 축복이 있단 말인가!
도무지 그렇게 못할 것 같은데!”
그러나 이상의 사실을 믿는 믿음을 우리는 반드시 소유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 믿음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께 의탁한 믿음으로서 사도와 같이 “그가 나를 사랑하시사 나를 위해 자기를 주셨다”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의롭게 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더욱 더 추구해 봅시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통해 영화를 받으십니다.

Ⅲ. 셋째로, 우리는 아브람의 칭의의 결과를 주목해 봅시다.

성경을 펴고 다음 사실을 유의해 보십시오. 그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기록된 바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들려주신 말씀, 곧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창15:7)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은혜롭게 믿음에 의한 완전한 칭의를 인식하게 될 때에, 보다 분명하게 부르심의 사실을 식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자기의 특권적인 분리사실을 인식하며, 왜 죄를 회개하고, 왜 자기의 의와 이 세상의 쾌락을 떠나서, 믿음의 생활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식별하게 합니다. 이제 그는 자기의 고차원적인 소명을 보고 그것의 상급도 봅니다. 칭의라는 한 가지 축복에서 시작하여 그는 소명을 받게 된 모든 유업의 축복을 주장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칭의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수록 그는 더욱 더 자기의 소명에 감탄하며, 또 세상과 완전히 분리해서 그의 주님께만 오직 충성함으로써, 부르심을 받은 소명을 확고케 하려고 열심을 내게 됩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과거에 몸담고 있던 속박으로 들어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용납된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보는 것을 의지해서 살던 삶을 더 이상 살지 아니할 것입니다. 내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던 때의 육적 인간으로 살 때와 같이,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생을 중단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은혜는 다른 은혜를 돕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한 행위는 또 다른 한 행위에 빛을 비쳐줍니다. 소명은 칭의라는 쌍둥이별을 나란히 가지고서 이중적인 영광으로 반짝입니다.

칭의를 얻는 믿음은 보다 분명하게 약속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이끌어 내었노라”(창15:7 참조)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년 전에 자기에게 내리셨던 약속을 그는 또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만큼 그토록 기쁘고, 그토록 분명한 이해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읽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젠 이 약속이 내 것이구나. 이 약속은 나에게 행해진 것이구나. 내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행한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이 약속의 성취에 대한 보증이 있구나.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에 신경을 쓸 것이 없구나. 어느 누구도 나를 힐난하지 못하리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사죄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비록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셨고, 더욱이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히 지켜주신다. 내가 정죄 받은 반역자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자비로 나를 부르시고, 나를 이런 용납의 자리로 이끄시고, 더욱이 나를 나의 모든 원수에게서부터 지켜 주시고, 또 나에게 그의 은혜의 언약으로 약속하신 유업을 주신다.”
그런즉 칭의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되면 여러분은 더욱 약속을 굳게 잡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 이 약속을 열심히 찾읍시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연후에 제사의 능력을 보도록 보다 분명한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해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족장의 손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는 푸줏간의 칼을 손에 들고 일했습니다. 그는 짐승들을 쪼개었습니다. 그는 새들을 잡아서 당시 하나님의 영이 계시해 주는 순서대로 비치해 두었습니다. 이제 모든 제물들이 그 자리에 놓여있습니다. 이렇게 하고서 아브람이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즉 제사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뿌림을 받은 분을 제외하고는 모든 문을 다 닫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속죄의 제사를 통해서만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의 귀에는 아직도 약속의 말씀이 쟁쟁하고, 자기를 의롭다고 기록하신 성령님의 펜촉에는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고 있는데도, 아브람은 하나의 제사를 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를 일찍이 아론에게 들려준 제사에 관한 모든 계시를 포함한 상징 속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을 때에, 또 그 믿음으로 인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를 보다 완전하고 명백하게 알게 된다면, 그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호흡할 수 있는 가장 순결하고 가장 온화한 분위기는 갈보이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제사를, 여러분이 잘 보지 못함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믿음이 연약해진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이 당연합니다. 그런즉 여러분은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구속자의 고난에 관한 기록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하나님의 어린 양 앞에 기도로 머리를 숙이십시오. 온 역사의 중심사건이 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여러분이 만약 잊어버렸다면,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얼굴을 붉히셔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대속의 놀라운 기록을 숙고해 보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믿음이 소생할 것입니다.
문제는 신학을 연구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논쟁점을 다룬 책을 읽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기쁘게 하는 어떤 신비로운 예언을 찾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근본적인 영양소입니다. 그것이 계속 여러분이 지켜야 할 정신이올시다.
아브람은 이미 칭의를 받은 사람이지만, 제사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온종일 해가 서산에 넘어갈 때까지 제사를 바라보았습니다. 제물을 먹으려는 새들을 쫓으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든 잡된 생각을 쫓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은 주 예수님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성품과 직분을 보기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은혜 안에서 자라고 여러분의 주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나는 것으로만 마냥 만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아브람이 배워야만 했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의 교훈일 것입니다. 그는 언약을 보도록 인도를 받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암소와 양과 숫양과 염소의 고기들이 마련되어 있고, 아브람의 일부는 이쪽 또 일부는 저쪽에 위치한 한가운데 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온종일 예배자로 서서 해가 질 때까지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해서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대속하는 위대한 제사를 보고 있으면서 자기도 그 가운데 속해 있는 것을 볼 때에, 그 두려움이 자기에게 임하는 데에 무서워하지 아니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제물 사이로 엄숙한 행위가 벌어지는 것을 그가 보았습니다. 그것은 연기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통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주던 구름 및 불기둥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징표를 가지고 여호와께서는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을 만나고 그와 언약을 맺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언약체결 형식 중에서 가장 엄숙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방나라에서도 특별히 엄숙한 경우에 행해지던 형식이기도 했습니다. 제물은 쪼개어졌습니다. 언약을 체결하는 양당사자들이 쪼개진 제물 사이에서 만났습니다. 이에 대한 이교도들의 해석을 들어보면, 만약 언약한 양당사자들이 언약을 파괴하는 날에는 이 짐승 제물들을 쪼갠 것처럼 쪼개 놓도록 저주를 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기쁘게 받아들일 해석이 아닙니다. 그것의 사실은 이런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죄인과 언약관계에 들어오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제물의 한 중간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같은 영광으로 강림하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연기의 구름처럼 우리에게 낮추시고 부드럽게 오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무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단번에 드리신 피의 제물을 통하여 오십니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가운데 두고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칭의를 받으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아침 여러분의 영적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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