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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60]
 
 
 
     
 
 
 
작성일 : 13-11-21 15:26
스펄전 설교-창세기(1) 14. 전사들을 만나주시는 예수님(창 14:18~20)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58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 14:18~20)

지금 읽은 본문의 말씀에서 아브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얼마나 아름다운 모형인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람에 관한 이 이야기를 우리 구주님과 관련해서 읽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 알아보기로 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이 풍성하사 우리를 자기의 형제들이 되게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소돔 땅으로 들어갔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시면서 혼자 안전하고 행복 되게 거하셨습니다. 수많은 우리 원수의 무리들이 무서운 위력과 잔인한 행동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물건을 무참하게 박탈당하고, 잊혀진 땅으로 들어가 영원히 사로잡힘을 당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한다고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것도 상실한 것이 없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대로 “위급한 때를 위해 나신 형제”(참17:17 참조)가 되셔서 거만한 원수를 추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원수들을 사로잡으시며, 강한 팔로 원수들을 강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원수들의 약탈품을 취하시며,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며 홍의를 입고 돌아옵니다. 그리스도는 취하지 아니했던 것을 가집니다. 4왕을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볼 때에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 오는”(사63:1) 아브람보다 더 위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구냐는 나의 질문에 누가 답할 수 있습니까?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사63:1)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동방에서 일어난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원수를 붙이사 그 화살에 쫓기듯 그루터기처럼 했습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들의 원수를 바람에 나는 겨처럼 몰아치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되시는 여호와 앞에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속죄하시는 어린양의 용맹으로 인해 그들은 영원히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이런 생각을 여러분은 품고 계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에게는 한가한 시간을 내어 생각할 문젯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무엇보다도 모든 믿는 자들의 모형과 상징이 되는 아브람을 생각해 볼까 합니다. 
그의 역사를 집약한다면 아마 모든 자들의 역사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에게 생긴 시련들을 여러분도 혹 체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브라함이 우리와 꼭같이 모든 점에서 시험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많은 점에 있어서 시험을 받아 마침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 불리우기에 적격의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는 그의 모든 자녀가 그의 신실한 가족에 속해 있듯이 혈육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주제를 다루면서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관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들이 자주 전투에 가담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는, 믿는 자들이 전투에 가담하지만 그들의 위대한 멜기세덱인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믿는 자들이 아브람처럼 멜기세덱을 만나는 은총을 받으며 그에 의해 떡과 포도주로 힘을 얻지만, 역시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의 10분의 1을 바친 것처럼 믿는 자들도 자기 자신을 새롭게 헌신하며 마땅히 바쳐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Ⅰ. 그런즉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여러분 모두가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는 자가 흔히 전투에 임하게 되더라는 점입니다.

이 전투는 내적 투쟁과 외적 투쟁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적 투쟁으로 말씀드리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무수한 육적인 부패와 관련되어, 사단의 시험과 자기 자신의 사악한 마음의 원하는 대로 따르고 있는 투쟁입니다. 그런데 외적 투쟁에서 흔히 맞붙어 싸우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고 한 것입니다.
아브람의 특수 경우로 인해 나는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가끔 우리 신자들은 자기 일 때문이 아니라, 그릇 행하고 있는 자기 형제들로 인해 전투에 가담하게 되더라는 사실입니다. 이 형제들로 말하면 나쁜 동료를 따르던 나머지, 마침내 사로잡혀 가는 신세가 되므로 부득불 옆에 있는 사람이 구출투쟁에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만 보더라도 투쟁은 아브람의 문제가 아니라 롯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롯이 소돔으로 갔습니다. 그는 참된 믿는 자의 분리된 길에 서지 않고 세상과 결탁하고 말았습니다. 악한 날이 당도하자 롯은 나머지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로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은 소돔 왕에 대해서 별로 많이 신경 쓰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아드마와 스보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칼집에서 칼을 빼었으리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롯이 나쁜 동료와 합해서 위험에 처한 것을 보자, 이 롯을 위해서 비로소 아브람은 칼을 뺐던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란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악한 조직과 결탁하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결국 사로잡힘을 당하며, 우리가 믿는바 그들의 마음이 가서는 안 될 곳, 그런 곳으로 가고마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나아가서 칼을 빼내 가지고, 그리스도와 또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공통적인 원수를 대항하기에 이릅니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죄 상태대로 가만히 방치해 두고, 또 그들의 악한 결탁에 안연히 거하도록 눈감아 두기를 바랄지 모르나, 우리는 그들을 인도하는 영적 상태가 어떤지를 꿰뚫어 보기 때문에, 그냥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양심과 하나님이 요구하면 우리는 칼을 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 완수되기 이전에 칼을 칼집에 결코 도로 넣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희귀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의 영적인 원수에 대해 칼날을 쓰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우리는 이런 원수들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교만과 나태와 정욕 영혼의 대 원수와 그의 교묘한 유혹과 불경,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쾌락과 이 생의 자랑, 시련과 우리의 직업을 통해 생기는 시험의 형태 속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수많은 원수, 이렇게 우리의 영적인 적들이 많기 때문에, 이 때에 우리는 우리의 칼을 언제나 빼놓고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믿음의 방패를 취해서 모든 기도의 무기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요단강 이편에 있는 한, 스스로 평안하다고 느껴서는 결코 안 될 일입니다. 이것은 원수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수풀 뒤에 원수가 숨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정신을 차려 원수가 쏘는 속삭임을 유의하셔서, 여러분이 그 잔악하고 무자비한 원수들의 희생의 제물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밤마다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생은 언제나 군병과 같은 생활입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병”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혹 어느 분이시든 그리스도인을 군병으로 묘사하고, 또 군병의 장비를 갖춘 보급품을 이야기하고, 군병으로서의 필요한 작전상황을 지시한 성경구절을 애써 찾아보신다면, 실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인을 묘사한 어떤 다른 비유보다도, 군병의 성질에 관한 묘사가 더 월등히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시고는 마냥 놀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주요 임무는 그의 주님처럼 진리를 증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을 위해 내가 출생했고 세상에 왔노라”(요18:37)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 속에는 그지없이 평화로운 사람이라도, 역시 주님과 같이 “내가 평안을 주려함이 아니라 칼을 던지러 왔노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디를 가든 그는 자기가 그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전쟁의 신호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안팎에는 늘 전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의 사람입니다. 그는 평화의 사람인 연고로 또한 전쟁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와 사단이 허물과 거짓과 맞붙어 싸움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그리스도인은 나쁜 친구와 투쟁하도록 부르심을 받기도 합니다. 

이 전쟁은 강력한 대상들과 맞붙은 전쟁이올시다.
본문에서 언급된 4왕들은 모두 위대한 군주들입니다. 우리가 이 왕들에 대해 세속 역사에서는 별로 언급을 거의 들어볼 수 없지만, 이 왕들이 본문에서는 매우 유력한 군왕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왕들은 본문의 서두구절에서 그 이름들이 언급되고 있는 거인들을 무찌르기 위해, 용맹스러운 군대의 힘을 빌리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평지의 다섯 왕을 처치하는 데에는 너무도 용이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아브람이 있습니다. 그는 소명시에 지니고 있던 사병 300명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담대하게도 여러 나라의 왕들의 완전무장한 수천 명의 군병과 대항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전쟁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는 너무도 벅차게 절대다수인 원수와 겨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미미한 벌레와 같으나, 결국 태산을 올라가서 정복하고야마는 미미한 벌레올시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연약해서 무시당하기 일쑤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자기의 힘을 측정해 보면, 철저하게 허약한 존재자임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승리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처럼 거룩한 전쟁에 황급히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런즉 비록 두려운 대상과 맞붙은 전투이지만, 그 전투는 오직 믿음에 의해 영위되는 전투임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은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하거나, 또는 자기 자신의 화살을 신뢰하고서 감히 전투에 나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믿음이 아브람의 계속적인 위안이 되었습니다. 때때로 아브람의 믿음도 실패했었을 경우가 있었습니다. 가장 평안할 경우에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의 정신은 다만 단순하게 하나님께 의탁한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보지는 못하나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 안에서 전투를 영위해 나갑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께서 어떤 다른 방법을 사용해서 전투를 끌고 나간다면 패하고야 말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만일 여러분 자신의 어떤 해결책을 가지고 전투를 시도한다면,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죄치고 여러분이 정복할 수 있는 죄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여러분은 죄를 처리하며, 승리를 거둘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가롭리가 여러분에게 제공해 주는 무기를 제외하고, 기타 어떤 다른 무기를 사용해서 전투에 임해 공격을 가한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가소롭다고 조롱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라”(요일5:4)고 했지요.
만일 여러분께서 믿음의 사람을 향해 무슨 무기를 사용하느냐고 묻는다면 여기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승리하노라”고 말입니다.
그런즉 예수 그리스도와 가까이 사십시오. 그의 구속의 능력에 의탁하시며, 그의 충만한 간구에 의탁하십시오. 그리고 외부의 모든 적과 내부의 모든 원수를 나아가서 대항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훌륭한 정복자가 될 것입니다.

이 위대한 전투를 아브람은 믿음을 가지고 이끌어 나갔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부여된 하나의 권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같이 임재해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돌라오멜은 무슨 일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에게 “이 모든 땅을 내가 네게 주었노라”(창13:14~15,17 참조)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습니까?
그러므로 그돌라오멜과 그의 동맹왕들은 그대로 침입자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단지 13년 동안 평지의 여러 도성에 권세를 휘둘렀던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도성과 그 도성 주위의 모든 것들은 사실상 아브람에게 속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람이 가나안의 모든 땅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관념을 무턱대고 조롱했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권리주장은 하늘 법정에서는 절대로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리에 의해 이 족장은 명실 공히 모든 땅의 상속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체결된 언약으로 인해 침입자인 모든 죄를 몰아내셔야 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잘못을 몰아내어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께서는 진리를 위한 종이며, 따라서 진리만이 생존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합법적인 전투를 감행함에 있어서 여러분이 기대하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의 소유자가 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무기가 드러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용맹을 다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강하신가를 보여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전투는 여러분의 전투가 아니요, 하나님의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어떠한 책임을 지고 전투에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지옥이 늘 그러듯이 고함을 치고, 세상이 온통 완전무장을 하고,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약해지며, 또 여러분이 마음과 조용히 이야기해 볼 때, 여러분의 육체는 여러분을 겁쟁이로 만들만큼 형편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겠지만, 그래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고 말하고, 앞으로 돌격해서 정복하시고 승리를 거두시기를 빕니다. 다윗은 말했습니다.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시118:11~12)
다윗이 이렇게 한 사실을 여러분께서도 다윗의 하나님을 통해서 능히 행해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행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형태의 전투에 종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온갖 수단을 총동원해서 사용하는 전투올시다.
이 전투는 모든 합법적인 도움을 요청하며, 모든 정력과 민첩함으로 자기 자신을 익숙하게 관련해야 할 필요가 있는 전투라는 말씀이올시다. 아브람은 한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서 “하나님이 롯을 구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 종들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셨으니까”라고 말만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보들의 망상입니다. 아브람은 이 문제를 당면해서 시간을 질질 끌며 그저 한가하게 원수를 뒤따라 나간 것은 아닙니다. 또한 아브람은 자기의 친구들인 아넬, 에스골, 마므레의 도움 없이는 나아가지도 아니했던 것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인이여, 만일 여러분이 죄를 정복하거나 진리를 위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수단방법이라도 발견하시거든, 그것을 버리지 마시고 지혜롭고 분별력 있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은 자기가 아무 것도 자력으로는 행해 낼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탁했으나, 그러나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의탁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 모든 것을 다 행하기도 했던 것입니다(이 얼마나 균형 잡힌 신앙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선행이 자기를 구원할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러면서도 역시 선행의 열매가 없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끼치는 수단방편들 그 자체가 자기에게 은혜를 안겨다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나, 동시에 그는 은혜의 수단 방편들을 절대로 무시하지 아니했으며, 오히려 그 수단방편을 사용하는 가운데서 하나의 축복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역, 개인기도, 성경을 공부하는 일 따위가 자기를 구원해 줄 수는 없음을 이해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도움들을 활용해서, 원수 앞에 부지런히 전진하여 담력에 찬 대결을 가할 때에, 오직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정하신 길에 서서,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다시 한 번 주목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능동적으로 신중하게 원수를 공격하되, 낮보다는 밤을 이용해서 진격했으나 그들을 완전히 정복하기 전까지는 결코 중단하지 아니했더라는 점입니다.
원수들의 대군의 한 모퉁이를 치는 것은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롯을 구출해 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아브람이 원수를 대항코자 나온 이상, 그는 확실하고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야마는 것이었습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나는 안일하게 앉아서 “이것으로 족하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결코 안 될 일입니다. 나는 나의 술 취하는 버릇을 파괴해 왔습니까?
나는 나의 불경건한 악습을 정복해 왔습니까?
나는 안식을 범하지 않고 있습니까?(소위 성수주일하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정직하고 순결해 왔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을 했다고 해서 그 곳이 내가 중지하고 서야 할 곳은 아닙니다. 자, 나는 나 자신의 자기기만과 자기 교만과 자기 태만을 떨쳐버리려고 애써 왔습니까?
그것도 좋고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완전에 이르지 못하는 그런 성취 따위로는 결코 만족하지 맙시다. 우리는 이 생에서 완전해질 것으로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해질 때까지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전진” 그리스도인의 표어입니다. 제지당하지 않고 있는 어떤 한 가지 죄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계속 투쟁하고 소리치며, 슬퍼하고 그것을 십자가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야곱의 지극히 능력 많으신 하나님과 씨름하여, 결국 하나님의 손을 내미사 구원받지 못한 그 사람을 구해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지상에 단 하나의 과오라도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말해야 할 말이 있으며,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한, 우리는 악을 대항해서 간증의 임무를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우리는 온전히 승리를 거두기까지 손을 거두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재산, 남녀 사람들, 롯,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반드시 되찾아 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참으로 완전한 승리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넉넉히 승리하는 자가 됩니다. 우리 다 같이 그렇게 되는 때를 기대합시다.
오, 형제들이여, 나는 승리자들이 그들 머리 위에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이고서, 의기양양하게 저 반짝이는 별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을 봅니다. 승리자들을 사랑해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최선봉에서 인도하십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신 위대한 정복자 그리스도에게 문은 열려집니다. 십자가의 군병들이 영원한 평화의 관문을 들어설 때에 그들의 기쁜 얼굴을 나는 봅니다.

내가 그들에게 어디서 승리가 왔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한결같은 소리로 그들의 정복을 어린 양에게로 돌리며,
그들의 승리를 어린 양의 죽음으로 돌리는 도다. 
자,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계시는 여러분은 오늘 아침 군병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들의 힘이 제아무리 놀랍다하더라도,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니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기를 지닌 자로서 신중하게 전투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다가 인내를 추가해야 합니다. 끝까지 신실해야 합니다. 승리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보좌 위에 앉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첫째 문제에 대해 많이 언급해 왔습니다. 이젠 둘째 문제를 이야기하는 동안에 성령님께서 그의 거룩한 능력으로 충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단지 말에 그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함께 하시기 빕니다.

Ⅱ. 신자는 열심히 영적인 투쟁에 가담하고 있는 동안에, 자기의 여호와를 볼 것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을 때, 인자가 그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고난의 시기를 당해 예루살렘을 건축할 때에 그들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다른 손에는 벽돌을 들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칼을 사용할 것을 가르치시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교훈하여 믿음 안에 우리를 세우기에 유의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전사들이 기운을 돋게 하는 고기가 필요함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전사들이 엄한 투쟁에 가담하고 있을 때에는, 그들의 영혼이 안연히 거하며 생기를 되찾는 특수한 위로가 필요함도 이해하십니다.
멜기세덱의 모형으로 제시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투쟁의 시기를 당면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먼저 오신 것은 그들이 지칠대로 지쳐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치루고 있는 개개인의 모든 전투에 있어서, 전투에 임하는 것은 개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상으로 그리스도께서 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투의 주역은 투쟁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대적들과 싸우기 위해 일선에서 수고해야 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올시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지체가 비록 아무리 보잘것없다하더라도,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개개의 모든 지체 간에 강력한 생동적 연합이 있기만 하면, 다함이 없는 동정이 있게 됩니다. 
형제여, 그대가 어느 때든지 믿음으로 싸움하여 결국 지칠 대로 지쳐있을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코 그대에게 아주 밀접히 교제하고 있다는 혹종의 증거를 제시해 드릴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단언한 사실이 있습니다. 즉 순교자들이 어디서보다도 하나님과 밀접히 관계하고, 교제하는 체험은 그들이 유배간 산의 동굴이나, 또는 숲지대에 혼자 떨어져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또 순교자들은 단언하기를, 비록 심한 고문대에 올라서거나, 뜨거운 불에 다룬 불수저에 지저지는 등 가진 형틀의 고문을 당하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임재가 그들에게 넘치는 기쁨이 되어 주기 때문에, 고통마저 거의 잊었다고 합니다.
주여, 풍성한 비를 내려주시사 당신의 기업이 시들어질 때도 다시 소생케 하시기 비옵나이다!
자,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있는 힘을 다 쓰십시오. 우리가 불가피하게 연약함을 면할 수 없지만, 우리의 힘이 소생하는 아름다운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치 독수리처럼 여러분은 날개를 펴고 높이 올라가서 하나님과 기쁨의 교제를 가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멜기세덱되시는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시련을 당할 때에 여러분을 만나 주십니다. 혹 전에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아니했다하더라도, 이번처럼 여러분이 곤경을 당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는 꼭 여러분을 만나 주십니다.

평강의 왕께서 또 어떤 이유가 있어서 돌아오고 있는 전사를 만났습니다. 아브람은 아마도 승리로 인해 교만해졌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런 태도야 말로 하나님의 어떤 자녀에게나 심히 위험한 감정입니다. 70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분명히 환희에 넘쳐서 “주여,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10:17)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조용하고도 겸손한 태도로 그들을 책망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이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정복했거나, 어떤 과오를 정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혹 영적 전투에서 성공을 거둘 때에 그들은 최선의 수단 방법을 들어 사용하며, 최선의 동기를 절감하곤 했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엉뚱하게도 교만에 들뜬 기분에 사로잡히게 될 우려가 있음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육신에 가시”를 주시거나 기타 어떤 것을 주셔서 제동을 거십니다. 더욱 더 좋은 것은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만에 대한 최선의 치료책은 그리스도를 보는 일 자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오, 여러분이 진정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에, 그때에 가서 여러분 자신의 매스꺼운 일, 더러운 일, 흉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 나는 그런대로 모습이 괜찮으나, 해가 뜨고 나면 나의 검은 모습이 드러납니다. 더할 나위 없이 희고 흰 그리스도를 내가 바라보기 전에는 그래도 내 자신을 스스로 순결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희고 흰 그리스도를 본 이후에 나는 쓰러져서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욥은 소리쳐 외치기를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6)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여러분의 교만의 깃발을 내리고 높이 올라간 자리를 내리게 됩니다. 죠지 허버트나 루더포드 같은 사람은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아주 밀접한 교제를 누리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임재가 온전한 치료책입니다. 멜기세덱이 오자 모든 영적 고질이 그 앞에서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정도에서 너무나 멀리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교회를 치료하기 위해서 어떻게 제안하셨습니까? 어디 여기 봅시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했습니다.
주님이시여, 병든 교회에 대한 주님의 기쁘신 처방책은 무엇인가요? 이에 대한 답변은 이것입니다.
“내가 미지근한 그대 라오디게아 교회와 자리를 같이하는 교제를 가지는 것이 곧 그대를 소생케 하는 것이라”(계3:14~18 참조)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런 장면은 요한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묘사하던 아주 암시적인 비유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주의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1:16)고 했습니다.
그런즉, 주님이시여, 내가 얼마나 어둡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군요. 주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환하게 밝아지니 말입니다. 의의 왕이 아브람을 중도에서 만나 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즉 아브람으로 하여금 승리에 대한 기쁨으로 시험을 당하는 생각을 떨어버리도록 하며, 또 아브람이 천지의 소유자 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안에서, 확고한 자기의 분깃을 정당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해 아브람을 중도에서 만나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방문하게 된 이유가 또 있지 않겠습니까?
즉, 아브람이 전에보다도 좀 더 기묘한 방법으로 시련을 당하려는 순간에 처했기 때문에 이런 방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소돔왕을 대항하는 것보다도 그돌라오멜과 싸우는 것이 더 용이합니다. 아래 평지에 있던 여호수아는 결코 피곤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때 그는 아말렉 사람들과 싸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에 있던 모세는 그 손이 피곤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활동이 보다 더 영적일수록 우리는 더욱 더 곤고해지기 쉽다는 이유입니다. 시험이 보다 더 영적일수록 우리는 그 시험에 희생의 밥이 되기가 더 쉽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험을 이기는 데에 보다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것이 소돔왕에 의해 롯에게 내린 매우 간교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아주 그럴 듯하게 보입니다. 완전히 정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람은 이 여러 사로잡힌 자들을 되찾아 왔습니다. 따라서 그는 탈취할 권리가 있습니다. 전리품을 취할 만합니다. 아브람이 그렇게 했다한들 누구라도 일반 법칙으로 보아서는 그를 책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차원 높은 법칙이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일반적인 도덕법칙들은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으나, 초자연적인, 고차원적인 도덕법칙은 그리스도인을 규제합니다. 나는 단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악에 눈길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자기 양심으로 그런 것을 생각도 하지 말도록 교육해 온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편견 없는 관찰자의 일반적인 판단으로 보아 그 행위에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자기의 주인을 욕뵈지 않도록 아주 품위 있게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경험상으로 비추어 보아,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또 주와 더불어 친교를 가지면 가질수록,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나 기타 어떤 것에 더 미련을 가지고 동경하게 되더라는 이상한 체험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은 매를 피할지 모르나 여러분은 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문 뒤에서 보복을 받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이 여기서 당하는 슬픔을 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할 것입니다마는, 여러분은 마음속으로 쓰라린 보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와는 진정으로 교제하되, 간교한 시험에 대해서는 완강히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썩 잘 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멜기세덱의 떡과 포도주를 우리가 먹는 것이 단순히 소돔왕을 만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오, 예수님이여! 내가 당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내 영혼의 눈에는 이 세상의 눈부신 아름다움 따위는 안중에 들지도 아니했습니다.
형제들이여, 그대도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기만 한다면, 화장한 음녀 세상은 그대의 사랑을 또 다시 빼앗아 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의 순전한 흰 떡을 먹었습니까? 진정 하늘의 순결한 떡을 먹은 이후에는 이 세상의 거무스레한 모래 섞인 떡 따위는 여러분에게 어울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떡은 그 속에든 자갈로 인해 치아만 상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잘 정제된 깨끗한 천국의 포도주를 마셔 본 체험을 가졌다면, 이젠 이 세상의 시금털털하고 물만 섞인 포도주를 마시려고 애태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천국의 술이란 그리스도의 석류나무의 향기 짙은 냄새가 풍기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가장 간교한 시험을 대항해서 힘을 기르기 원한다면, “내가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다”(아1:2)라고 부르짖고, 여러 가지 시련을 향해서도 돌진하여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자로 말미암아 넉넉히 승리하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만났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말해왔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멜기세덱이 행한 일을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기로 합시다.
멜기세덱은 무슨 자격으로 아브람을 만났습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멜기세덱은 왕의 제사장직을 지닌 자격자로서 아브람을 만나주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그리스도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가 벌이고 있는 모든 전투에서 그는 제사장과 왕의 신분으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의 자격으로 우리를 방문해 주신다니 이 얼마나 자비로운 일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를 대항해서 싸운다하지만, 다소라도 우리는 죄에 물들지 않고, 아주 결백한 신분으로 싸울 재간은 없기 때문입니다(그러기에 우리가 전투할 때에 우리 죄를 속해야 할 제사장이 동반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옳은 길에 들어서서 점잖게 행동한다지만, 과거를 되돌아보아 조금도 후회와 눈물이 없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엔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나는 믿는 바입니다.

심지어 마르틴 루터나 죤 낙스와 같은 사람도, 그들이 믿음을 위해 분투한 사실에 대해서는 유감의 뜻이 없을지 모르나, 그들도 임종시에 침대에서는 그들 스스로 느끼기를,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 자기들이 한 행동 속에는 육적인 것이 다소라도 혼합되어 있었음을 부정하지 못한 것으로 나는 믿는 바입니다. 아마 끝까지 그런 상태가 계속될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의 죄와 정욕을 두고 과감히 우리는 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회개합니다. 그러나 이 회개 속에서도 또 회개해야 할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가면서도 십자가를 떠나려고 뒤로 움죽거립니다. 그러므로 무언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시니 만사 해결입니다! 나는 제사장되시는 그리스도를 얼마나 만나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제사장되시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께서 갈보리와 거기서 흐르는 피를 볼 때에 모든 영적 전투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만나야겠다는 필요성을 고백하지 아니하시렵니까?

그러나 멜기세덱은 또한 한 왕이기도 합니다.
진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투를 감행할 때마다 언제나 우리 하나님을 뵙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현재 투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본문의 한 구절을 말한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다스리로다”라는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은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사단의 발에 잠시 밟히고 있으나 내 원수가 내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 내 비록 넘어지나 내가 다시 일어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다스리심이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생각해 보면 패배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마는, 그래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주관해 주신다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 교회가 넘어지고 우리의 깃발이 더러운 진탕에 떨어지는 것을 볼 때도 있으나 그래도 우리는 위로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끝까지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 영화롭게 하셨으니 말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2:9~10).

만사가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는 의와 평강의 왕을 얼마나 사모해야 할지 모릅니다! 나오십시오! 주님의 영화로운 수레에 오르십시오! 타고 승리하며 정복하면서 달리십시오. 이 수레는 세필의 백마가 끌고 있으니, 곧 온유와 진리와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도 주님을 찬양하며, 땅도 주님께 순종하며, 지옥이 주님의 임재로 부들부들 떨며, 놋문이 주님의 접촉으로 부서지고, 철장이 주님의 말씀으로 끊어집니다!
오, 영원하신 왕이여, 영화롭게 수레를 타시고, 또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을 보게 하시며, 당신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아야만 합니다. 그와 가까운 친교를 통해 진정 그리스도를 볼 수는 없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직접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만나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감히 생각도 하지 아니했을 때에 별안간 여러분을 세우십니다. 그렇게 여러분을 세워놓으시고는 그리스도 자신을 여러분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그는 다른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씨름하기 이전의 야곱이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의 군대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들이라 할지라도 여호와 자신과 비교할 때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자들의 군대를 만나는 것도 상당한 축복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천사장 미가엘, 곧 언약의 사자를 만난다는 것은 더욱 더 축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을 만난다는 것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같은 나도 만나 주실까요?
하나님은 여러분도 만나 주실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나를 만나주실 것이라고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며 살아왔습니다.
“내 눈은 지극히 아름다우신 왕을 보았도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대제사장과 왕되신 그리스도를 보아왔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말할 수 없이 위로를 받고 거룩한 기쁨으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런 질문이 있을 법합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말입니다.
예, 한 일이 있지요.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떡과 포도주를 갖다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기의 살과 피를 제공해 주신 예수님의 하신 일을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합니다. 즉 여러분이 주의 만찬시에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 떡 속에 예수님의 살이 있고, 포도주 속에 예수님의 피가 있거나, 아니면 떡이 살로 변하고 포도주가 피로 변한다고 말하는 따위입니다. 그러나 진정 영적인 사람들은 이런 상징들은 영적 능력을 깨우친다고 이해합니다. 또 그들은 영적 능력은 입과 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진정 영적으로 먹고 마실 때에 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리로만 전적으로 배불리함을 받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음식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이런 교리가 제공하는 것 이상으로 풍성하게 영양을 보급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매우 침울해질 때는 나는 차분히 높은 교리들,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 선택, 최종구원 등에 관해 연구해 봄으로써 한결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 어떤 때는 매우 낙심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때는 이상의 교리들과 같은 음식으로 충족되지는 않습니다. 그땐 나는 바로 내 주님 자신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떤 투쟁에 있어서는 주님을 제외하고는 어떤 음식도 불멸의 영혼을 지탱하는 데에 적절한 음식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손가락으로 주님의 못자국을 만지며,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며, 주님과 계속해서 교제를 나누는 것이 음식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불신앙에 대한 강력한 효능적인 치료책이며, 믿음에 대한 최선의 음식입니다. 주님의 명백한 임재 자체가 우리들에게는 가장 고상한 음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모든 것이 조용하고 평화롭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시기 전까지는 계속 우리는 어두움에 거합니다. 우리는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성전에 올라오는 예배자도 성전에 있는 놋대야를 의지하고 살아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또한 성전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정금으로된 불집게를 붙들고 살지도 못하며, 그룹들을 상징한 형상을 믿고 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배자는 희생제사에 바친 어린양의 제사장으로서 동참해야 할 필요가 절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참된 음식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음식은 많은 규례와 교리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오직 성전의 귀한 기물이며 제복에 불과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자신만이 우리를 육신이 되셨으며, 우리는 우리 영혼속으로 기꺼이 그를 영접해 들여서, 그로 인해 배불리 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브람처럼 기쁘게 우리의 길을 전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왕의 대제사장께서 족장을 위해 행했던 일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자, 이제 나는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한 말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여러분께서는 인내로 들어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먼저 멜기세덱은 그를 축복하고 다음에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 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해 주시기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일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축복해 달라는 사실입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창14:19)라고 멜기세덱은 빌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하는 일에 축복이 내리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힘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결국 공연한 허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나는 말문이 닫히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위해 전력했을지 모르나, 우리들의 증거를 인해서 진리를 알거나, 빛을 보거나 한 영혼이 단 하나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부드럽고 고운 마음을 품고 나아가서,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려고 하고 있으나, 우리는 하나님의 팔이 나타나지 아니하는 한, 한 사람의 죄인도 이끌어내어 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사53:1)라고 말한 선지자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팔이 사람들에게 오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을 우리는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천지의 주재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면, 우리의 이 세상 일이 축복을 받으며, 우리의 말이 축복을 받게 되어 우리는 결국 하늘의 축복을 가지게 됩니다. 하늘의 안식과 평화, 하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늘에서 내린 강력한 힘의 영광 가운데서 우리는 승리에 확신을 가지고 나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축복받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축복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은 지난 주간의 전투로 인해 지칠대로 지쳐 있으며, 이젠 여러분 자신의 시련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처지에 이른 만큼, 지금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시며, 또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멜기세덱이여, 나를 축복해 주옵소서! 오, 예수님이여, 지금 나를 축복해 주옵소서!”
천지의 주재되시는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된 우리 중 어느 한 아들도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축복을 안겨다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멜기세덱은 단지 이상과 같이하는 것에 그치고만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제사장직의 다른 일면도 완성했습니다. 즉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여기서 노래할 때마다, 그리고 우리가 옳은 길에 들어서서 다닐 때에, 나의 영혼은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능력과 위력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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