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창 12:5)
여러분이 한 자녀의 성품을 알고 싶으면, 그 아버지를 잘 뜯어보면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어린 새는 아빠 새가 전에 하던 그대로 날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자녀의 생애를 알고자 하면, “믿음의 조상”의 역사를 검토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한 모형입니다. 잘 유의해 보기만 한다면 그의 생애에 대한 진술은 하나님의 모든 성도의 역사를 비쳐주는 거울입니다. 그의 신앙역사의 시작은 처음 그가 자기 본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에 들어가던 때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능한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부터 분리해 나와서 위대한 명령, 곧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후6:17~18)는 명령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 때일수록 아브라함의 신앙역사의 시작은 우리의 유효한 소명에 매우 교훈적인 제안이 됩니다. 믿는 사람의 생애는 아브라함의 생애와 같은 것입니다. 즉 그 생애는 분리된 생애입니다. 혈과 육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향 이상의 다른 어떤 영향으로 말미암아 움직이는 생애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그 안에서 행하는 생애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란 최고로 재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명령, 임재, 승인이 통하는 영역이며, 또 마치 배의 키를 잡고 있는 배의 타수처럼, 믿음으로 영혼이 지배당하고 있는 그런 세계입니다. 이런 세계, 이런 영역에 거하는 생애가 그리스도인의 생애입니다.
아브람은 육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장막도 없이 떠났으며, 하나님께 성결을 지키며, 하나님의 친구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 낯선 객이 되었습니다. 그의 분리된 삶의 시작은 우리에게도 같은 삶의 시작에 대한 생생한 그림입니다. 아브람의 소명은 우리 소명의 대표입니다. 이런 면에 나는 오늘 아침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바입니다.
Ⅰ. 첫째로, 유효한 소명은 아브람의 소명에서 실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에 대한 이야기 전체를 읽어온만큼, 나는 다만 여러분의 기억만을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창세기 11장 마지막절과 12장 전체를 유의해서 읽어보십시오. 그리하면 이야기의 실마리를 취하게 됩니다.
첫째로, 아브람의 소명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입니다.
전체적으로 보아, 온 세상은 이방 종교의 우상 숭배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차로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새겨서 만든 형상을 섬기는 데로 나아갔습니다. 여기저기에 더러 예외는 있습니다. 가령 욥이나 멜기세덱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심한 어두움이 사람들을 덮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한 가족을 택해서 그 가족이 나중에 하나의 특이한 나라로 번창하고, 참된 신앙의 보유자로 되게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신 이유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거짓 신들을 섬기는 데로 기울어졌습니다. 여호수아는 24장 2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다”(수24:2).
그러고 보면 이 가족도 인류의 다른 가족만큼 부패하지는 아니했을지는 모르나, 하여간 부패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들의 후손 라반의 집에는 드라빔이 있었습니다(드라빔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기 이전에 일반적으로 섬기던, 종교적인 가신으로 섬기던 우상~역자 주).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는 데라의 집에 내렸으며, 그 은혜 받은 가정에서부터 만군의 여호와는 아브람이란 사람을 선택한 것입니다.
나는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목적 속에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아니한 어떤 사실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다 알지 못해 의심스러울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가장 현명하고, 가장 경건한 이유가 있어서 선택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브람도 허물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람은 많은 미덕이 있는 사람이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미덕들도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그것들을 그에게 주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미덕들은 선택의 원인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는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9)(롬9:15 참조)고 한 하나님의 선포를 실천해 내는 하나님의 주권의 한 본보기였습니다.
흔히 예언자들은 아브라함에게 대해 말하기를 그에게 내린 하나님의 자비는 마땅히 찬양을 받아야 하지만, 족장에게 어떤 개인적인 공로가 있어서 은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사51:1~2).
여기 보면, 아브라함은 말하자면 채석장이나 구덩이에 비교되고 있습니다. 이것에서 한 나라가 파내어졌습니다. 조상들은 이 구덩이를 보고 자연히 스스로 겸손해져야 할 광경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즉 조상들의 공적 따위는 실로 아무 것도 아니로되, 하나님의 은혜만이 전부인 것입니다.
또 다시 “너의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라”(신26:5)고 했습니다.
아람 사람이라고 불리운 사실은 아브라함도 본질상으로 다른 사람들과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람 사람들이 우상숭배자이듯이 그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란 말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그들이 신체적 굶주림이나 질병으로 유리하다가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암흑, 참된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죽게 되는 것으로 봅니다.
“멸망 받게 되었으나” 영원한 자비가 그에게 내리시며 그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다음의 사실을 받아들이든 않든 그 진리는 영원히 굳건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롬8:28~29)란 말씀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모든 경우의 유효한 소명은 다 영원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른 예정은 신자가 즐기는 모든 언약의 축복의 원천입니다.
그대의 무가치한 이름이 위에 있는 생명책에 등록되지 아니하고서는, 그대는 죄를 느낄 수도 없거니와 용서의 사랑의 맛도 알 수 없으리라.
다음으로 아브람의 소명은 하나님이 적용하고 실시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천사가 아브라함을 불렀거나 또는 한 선지자가 그를 불렀다는 말을 일체 들은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의 지성이 동기가 되어 자발적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 왔다는 말을 우리는 역시 들은 적이 없습니다.
스데반은 죽어가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한 바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행7:2).
아브라함의 마음엔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의 실재와 인격에 관한 특이한 계시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 후 아브라함은 비침을 받아 바로 그의 깊은 영혼 속에서 여호와의 실재와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메시지가 왔습니다. 아마도 그 메시지는 귀에 들리는 소리로 온 것 같습니다. 그의 마음에 아주 위력적인 인상을 받았음에 분명합니다.
그가 들은 말소리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행7:3)는 외침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참으로 구원받게 만드는 모든 은혜로운 부르심 속에는, 그 소명 자체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중간의 대리자가 있기는 합니다.
가령 목사가 설교를 하며, 성경책이 살아있는 빛이 되며, 섭리가 하나의 경고가 됩니다. 이 경고는 이해되어지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역사가 없이는 목사도, 성경책도, 섭리도, 사람으로 하여금 유효한 조명에 이르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오, 나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영혼을 구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손을 내미사 역사하시지 아니하시면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죽은 영혼을 아무리 불러도 그 영혼은 그대로 잠자고 있을 것입니다마는, 예수님의 음성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꺼내어 왔습니다. 나는 진리를 듣고 계시는 여러분이 단지 진리를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하는 사람이 되지 말기를 부탁하는 바입니다. 모든 방편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그 팔과 은혜의 능력을 계시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말씀이 여러분의 귓속을 단지 통과하거나, 또 여러분이 말씀을 그대로 암기하고 있는 것으로 결코 만족하지는 마십시오. 그 말씀이 바로 여러분의 가슴에 박히기를 위해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성령님이 되시는 하나님의 효과적인 역사하심을 통해 깊은 영혼 속에 그 말씀이 거하도록 위해 간구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올시다. 그러나 성령님에 의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내적 영접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모든 것이 다 허사입니다. 초자연적인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는 무척이나 값없이 받는 구원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할 때마다 내가 잊을 수 없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는 거듭나야 하리라”는 구절과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리스도에게로 나올 수 없느니라”(요6:44 참조)는 구절입니다. 단순한 자연인은 제아무리 훌륭해도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법입니다. 자연인의 쏜 화살은 너무도 미약해서 표적을 맞힐 수가 없습니다. 자연인의 미약한 팔은 너무도 허약해서 거룩한 변화를 초래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그런즉 효과적인 소명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역사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중 여러분, 다음의 구절이 오직 여러분을 구원해주시는 주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 바랍니다.
부드러운 연민의 눈으로 나를 보시사
나의 완악함을 녹아주시옵시고,
당신의 사랑의 부드러움으로 나를 치사,
이 돌같은 마음을 깨뜨려 주옵소서!
다시 아브라함의 경우를 봅시다.
그 소명은 개인적이었습니다.
이 소명은 나아갈수록 점점 더 개인적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소명을 받았을 때에, 그는 아마도 생각하기를 자기가 자기의 아버지 데라와, 기타 다른 식구들을 자기와 함께 동행하자고 설득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실제로 아브람은 어느 정도까지는 승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하란까지는 같이 온 것을 보면 그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족은 하란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우리에게도 얼마나 자주 이런 일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역사하시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도 우리와 함께 가도록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중도까지만 따라오면 그들과 중도에서 그만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헛되이 남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즉, 우리는 분명히 소명을 받았지만 기타 다른 동행인들은 우리와 같은 소명을 받지 아니했을 경우, 그들과 우리 사이에 불가피하게 분리가 있게 마련인데도, 우리는 그들 모두를 우리와 같이 느끼고 행동하도록 이끌 수 있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속이는 행위올시다. 사랑이 원하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적 성품과 중생한 영혼은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양자 사이에 구별을 두십니다. 우리는 그가 한 도성을 취하고 한 가족 중 둘을 택해 그들을 시온으로 인도해 가는 것을 보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 아브라함에게 다시 메시지가 왔습니다.
“너의 친척에서부터 떠나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친척과 함께 나오라는 것은 아닙니다.
“너의 아비 집을 떠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브람이 거주지 하란을 떠나 단호하게 전진해서 결국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과 내가 진정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분명한 개인적인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단지 무리의 한 사람이 되어 복음을 듣기는 하지만, 남에게 전하는 말처럼 귀넘어듣기만 한다면, 그런 복음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복음을 정신 차려 들을 때에, 진리는 내 것으로 나에게 들려집니다. 그리하여 이 복음의 진리가 나의 입장을 다 묘사해 주며, 나의 비참함을 계시해 주며, 나의 소원을 깨우치며 나의 소망에 불을 붙여줍니다. 그때야 하나님의 능력이 내 영혼에 구원을 안겨다 주는 것입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그냥 대중 속에 파묻어 버리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의 단독인으로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여러분이 이 큰 군중 가운데 계시지만 정신적인 한적한 곳에 여러분을 자신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분에게 직접 들어오게 하십시오. 마치 농부가 목적이 있어 파놓은 밭골에 뿌리 완두콩이, 마침내 땅에서 싹이 터서 결실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에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직접적이고도 명백한 개인적인 부르심이 마음과 양심에 부딪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효과적인 부르심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브람에 대한 이 소명은 분리를 위한 소명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분리는 지극히 참기 어려운 분리였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 분리란 너무도 철저한 분리였기 때문입니다.
“너 본토를 떠나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추방해서 한 사람의 외방인, 낯선 객, 이국인이 되라는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너 친척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혈육의 결속을 은혜의 결속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척관계를 형성하여 혈육에 속하지 아니한 관계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너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안위와 안식의 집에서 떠나라는 명령이지요. 상속과 애정의 가정을 떠나라는 것이죠. 그리하여 이젠 다른 아버지, 다른 집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 땅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발견할 수 없고 하나님이 그에게 반드시 계시해 주는 땅이었습니다. 그런즉 잘 관찰해 보십시오. 효과적인 소명이 사람에게 올 때는 언제나 분리하는 칼과 같아서, 옛 관계에서 그를 단절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이란 자기의 본토가 아님을 잘 압니다. 그는 이 세상에 있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아니한 살을 삽니다. 그것은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도성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도성에서는 외국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죄악에 머물고 있는 그의 가족과 친척에서부터는 여러 면에서 분리 당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아직도 욕을 따라 살며 이 세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쾌락은 이 세상에 있습니다. 저들의 위로는 이 하늘 아래 있습니다.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같은 집안에 산다해도, 그는 다른 사람이 지닌 것과 같은 동기의 영향력 밑에서 살지 아니하며, 또 다른 사람과 같은 욕망의 지배를 받지는 않습니다.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여타의 사람과는 너무도 판이해서, 흔히 다른 사람에게는 따돌린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한 것같이 이 세상의 아들들이 부활의 자녀들을 조롱합니다.
은혜의 소명은 그것이 더 크게 들리면 들릴수록 더 완전한 분리를 말합니다. 먼저, 어떤 믿는 자들에게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다만 부분적으로만 일치하며, 아직도 세상적인 세력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들은 세상과는 짝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온전히 떠난 것은 아닌 상태에 있습니다. 실로, 우리 대부분이 이런 상태에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속한 것으로 성숙해지면,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결단은 보다 완전해지며,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우리의 복종은 보다 완전해집니다. 그리고 우리와 세상 사이에는 보다 커다란 분리가 가로 놓이게 됩니다.
오,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위대한 진리를 믿고 실천해내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너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느니라”(요17:14~16)는 이 진리를 생활에 옮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교적 속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눅16:13)고 했으며, “하나님이 진정 하나님이실진대 하나님을 섬기며, 바알이 신일진대 바알을 섬기라”고 한 때문입니다. 어느 것이 참이며 옳은가를 마음에 확정하십시오. 타협을 추구하지는 마십시오.
기독교 신앙의 근본 요소는 세상과의 분리입니다.
금욕적 생활의 분리는 압니다. 우리는 중도 아니요, 수도사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두시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사람 가운데 거하신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잡수시고 마시셨습니다. 예수님은 금욕주의를 선포하지도 아니하셨으며, 다른 사람들과 결코 떠나 살지는 아니했습니다. 사람들 속에 계신 사람으로서 완전무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얼마나 철저하게 죄인들과 분리되어 있는지 모른답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무리 가운데서 마치 하나의 천사처럼 다른 사람들과는 엄격히 구별된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나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농장과 도매시장으로 나가십시오. 가정과 시장으로 나가십시오. 그리하여 여러 사람과 어울려 있지만 그들의 원리에는 혼합되지 마시며, 또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에게는 결코 순종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도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라고 했습니다. 악에서 떠나 보존될 때에, 여러분은 아브람이 문자적으로 행한 대로 영적으로 실천해 낼 것이며, 여러분은 효과적인 소명의 힘을 입어 능히 친척과 아버지의 집에서 나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브람의 소명은 그의 마음과 의지에서 유효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잠시 동안 여러분께서 그의 순종에 유의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것은 아브람의 경우로 보아서는 커다란 희생이 내포된 소명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친족에게서 분리해 낸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먼저 그에게 있어서 이런 친족과의 분리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데라가 죽기까지 하란에 머물렀습니다.
형제들이여,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린 아이의 장난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느리라”(마10:37).
많은 경우에 있어서 기독교의 최대의 원수는 우리의 최고의 친구일 때가 허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영혼의 최악질 원수가 자기 가슴에 누워있는 것을 봅니다. 많은 자녀가 자기의 육신을 키워 주시던 아버지가 자기의 영혼을 죽이는 데에 최선을 다하더라는 사실을 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사람이로다”(미7:6)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길에는 아무 것이나 거리끼는 관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위대한 주시요, 왕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충성의 신실함을 포기케 하는 인간관계가 있다면, 그것이 제 아무리 아끼는 관계라 할지라도 재빨리 파괴해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과 그리스도 사이를 갈라놓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남녀 여러분은 특별히 경고를 받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혼을 하거나 또는 어떤 참여의 일에 있어서 불신자와 격에 어울리지도 않은 멍에를 함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이올시다. 왜냐하면 불신자와 무분별하게 멍에를 같이한 결과로 쓰라린 슬픔을 당하고 말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총애 안에 들어온 사람을 제외하고 기타 여하한 사람과도 여러분이 좋아라고 함께 어울려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슴에 있는 사랑하는 자와 영원히 분리되기를 원하지 않을 때는,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곧 여러분의 주님과 또 이미 분리되어 있는 믿는 사람들과 결합하지 않겠다는 속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개심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불경건한 자들과 관련을 맺고 있을 경우엔, 사실 그럴 때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여러분은 그들을 사랑해주시되 여러분이 개심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사랑하던 것 이상으로 사랑해 주시고, 과거보다도 더욱 친절히 대해주시고, 더욱더 애정을 그들에게 쏟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들의 좋아하는 죄에까지 들어가서 순종하여 그들을 즐겁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될 말이며,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여러분의 마음의 순결을 더럽혀서도 결코 안 될 말입니다. 어떤 희생을 겪더라도, 만일 여러분이 은혜로 진정 부르심을 받았다면 모든 것을 뒤에 버리고 나아오십시오.
제인 테일러처럼 이렇게 노래를 불러 봅시다.
너 감미롭게 유혹하는 자여, 물러가라.
너 아끼는 우상이여, 무너지라.
너는 내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없노니
예수께서 내 사랑을 온통 차지 했도다.
그 아픔 쓰리고 괴로워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피흘리는 마음을 감싸주노라.
아브라함의 경우엔 순종하게 만드는 많은 신앙이 요청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결코 보지도 못한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는 다만 어느 방향으로 가라는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곳이 어디인지 보여 주시게 되었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했던 것과 같은 여행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들의 여행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음을 먼저 기억합시다. 위엄을 찾는 옛 사람들은 자기들이 자라던 그곳에 기반을 닦고 살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야 미국이나 오스트랄리아로 여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여행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조부들만 하더라도, 자기들이 살던 고향을 떠나 외지로 간다는 것은 실로 두려운 일로 생각했으며, 이국땅에 이민가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마치 달나라에나 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좀 더 뒤로 소급해 가보면, 여러분은 대대로 내려오는 가족에 붙어 있으려는 강한 집념이 사람들 속에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렇게 고향 친척을 떠나야 했습니다. 70세가 넘어서 새삼스럽게 이민의 신세를 져야만 했습니다. 그는 어느 특정한 장소로 가야 하는지 물어봄직도 했습니다마는 그는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저 만족스럽기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여행을 정하셨으며, 그는 그냥 순례자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우리 하늘 아버지의 지시하심을 주저 말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을진대, 우리에겐 믿음을 활용해야 할 많은 필요사항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다루심을 진정 이해할 경우, 만사가 그저 평탄하게만 지나가고, 또 여러 가지 면에서 여러분이 종교의 결과로 마냥 번창만 한다면, 여러분은 혹 하나님의 백성이 설 궤도에 오르지 아니했지는 않는가라고 한번 걱정해 볼만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것은 많은 환난을 통해서 된다고 했으니까요. 그 환난이 여러분의 최대의 모든 신앙을 요구하는 것일지라도, 여러분은 계속 버티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국 영화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도록 명하시면, 그것이 비록 최대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되어질지라도, 여러분은 그 일을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여러분의 체험을 통해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잠시 더 시간을 내어 아브람의 순종에 유의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아브람의 순종에는 많은 손실이 따르며, 또 폭넓은 믿음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매우 위대한 약속에 기초한 것임을 알려드리고자 원한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순종에 따른 약속은 너무도 광대하고, 그 유례가 없는 굉장한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를 축복한 모든 사람은 축복을 받습니다. 아브람은 온 우주에 대한 축복이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약속을 참된 것으로 믿기만 한다면, 순종해야 할 강한 동기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과감하게 그리스도를 위해 분리의 길로 들어가 믿음으로 행하면, 이제부터 앞으로 우리를 격려할 약속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하에 성경구절들을 보기로 합시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84:11)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시37:3)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리니”(수1:5).
“여호와를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 하리라.”(욜2:26~27 참조)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막16:16)
“만물이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
형제들이여, 여러분에게 안겨질 면류관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은 오직 영생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을 보십시오! 그것은 그 문이 진주요, 그 거리는 정금인 도성입니다. 여러분의 비길 데 없는 분깃은 형언할 수도 없는 축복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황홀한 축복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끝없는 세계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따름으로 인해서 상실하는 것을 금생에서도 110배나 받을 것이며, 내생에서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인즉 용기를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진리를 위해 세상을 버리며 친구를 잃는 다해도, 여러분은 불멸하는 영의 친구들을 가지며, 천사들이 여러분의 수종자가 되며, 그리스도가 친히 여러분의 위대한 벗이 되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시니 용기를 가지십시오. 약속을 참되이 믿기만 하면 여러분은 앞을 향해 잘 전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나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실할 수밖에 없던 그것을 약속의 축복에 비하면 실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생기는 지금의 가벼운 고난은, 장차 여러분 안에 계시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즉 형제들이여, 진정 우리가 아브라함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또한 아브라함의 격려도 가진 것인즉, 즐거워하십시오.
자, 나는 여러분에게 이 효과적인 소명이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가지고 온 순종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이상, 나는 여러분에게 오직 한 가지 사실을 기억케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은 실제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는 결코 중지하지 아니했더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은혜로 말미암아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진정 그가 예수님께 의탁하며 믿음으로 안식에 들어가기까지는 결코 평화나 안식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하나의 모범으로 등장된 인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단 하나의 질문이라도 던지기 위해서 중지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가라는 명을 받자 가나안으로 갔을 뿐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아주 철저하게 자기 일을 했었습니다.
그는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가나안에 갔었습니다. 그는 하란을 즉시 떠난 후엔, 말하자면 자기가 건너온 다리를 사정없이 파괴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다시 돌아가리라는 생각을 모두 포기해 버렸습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듯이 만일 아브람이 돌아가기를 원하기만 했더라면,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모든 옛 관계를 전부 단절해 버렸습니다. 그는 오직 약속의 나라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속력을 다해 하늘나라와 보이지 아니하는 축복을 향해 돌진해 나간 것뿐입니다.
오, 성령님이여, 우리 개개인을 이와 똑같은 형태로 불러주시옵시고, 같은 모습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옵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생명 자체라도 포기해야 할 경우, 미련 없이 그렇게 되기를 선언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이는 예수님이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찬양하리니
그의 명령은 고상하도다.
내가 땅에서 일어나 기쁨을 찾노니
그 기쁨은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도다.
내가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노니
세상의 지혜와 명성과 능력을 다 버리노라.
오직 나의 분깃은 여호와시니
그는 나의 방패요, 요새로다.
여호와께서 친히 맹세하시니
나는 그의 맹세를 의지하노라.
내가 독수리의 날개를 타고 저 하늘 높이 오르리라.
내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리라.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을 노래하리니
내 영원히 노래하리라.
나는 잠시 동안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효과적인 소명과,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받고 있는 그저 평범한 소명간의 차이점을 관찰해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형제들이여, 여기엔 진실로 영광과 불멸에로의 소명을 받은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소명이라하지만 그것이 사람에게 속한 소명, 사람에 의해 된 소명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가운데 신앙 고백한 어떤 혹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단지 강사의 웅변이나 부흥집회시의 흥분에 의해 부름을 받은 자도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여러분은 그 근원이 하나님의 보좌에 근거하지 아니한 강을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의 사역 속에서 생겨나지 아니한 구원 따위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부터 나온 구원만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사랑에서 나오지 아니한 행위는 결코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소명이 그들에게 내려질 때에 그들은 그 소명에 순종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많은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열과 성을 다해 애절하게 진리를 말해 줄 때, 그들은 그 진리의 능력을 다소라도 느껴야 합니다마는, 그러나 그들은 그 진리가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지 조차 잘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애지중지하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선, 마치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다가 멸하고 맙니다. 그들은 천로역정의 유순처럼 절망의 골짜기까지 여행은 하지만, 진흙길을 싫어해서 질겁하여 길옆 가장 가까운 집으로 달아나 결국은 멸망의 도성으로 돌아가곤 맙니다.
나는 혹종의 부르심을 받아 가나안 땅을 향해 가려고 노력은 하고 있으나, 아직도 하란 땅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려 하면서도, 생활은 과거에 해보던 그대로 해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아직은 세상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유다지파의 사자와 무저갱의 사자를 같은 수레에 메고, 그것으로 생명의 거리를 달리도록 하려는 따위의 엄청난 불가능한 일을 해 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소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즉석에서 나오도록 합니다. 그러나 단지 인간의 육적인 천성에 오는데 그치고만 소명이라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과 더불어 같은 단에 묶여있도록 만들 것이며, 마침내 죄인이 들어갈 불에 같이 던져지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왔지만 결코 가나안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의 시체를 떠나 온 이스라엘 자녀들이건만, 그 마음이 아직도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출발이야 깍듯이 했으나 부추와 파에 대한 입맛이 입 안에서 떠나지 않고 있어서, 그들의 마음은 온통 애굽의 고기 삼던 가마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늘의 유성처럼, 그들은 두개의 충격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늘로 이끄는 충격이요, 다른 하나는 땅으로 가라앉게 하려는 충격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치 방앗간의 연자매 돌리는 말처럼 전지도 없이 그 자리만 뱅뱅 돌고 있습니다. 계속 명목상으로만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실제로 자기들 마음에는 다른 수다한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여러분을 출발하게는 만들지만 진작 떠나가도록 인도하지 않는 따위의 소명은 일체 주의하십시오. 원컨대 오늘 설교의 본문이 여러분에게 사실이 되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12:5)
구원받으려는 기도로서 만족하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이 구원받기까지는 결단코 족하게 생각마십시오. 믿으려고 노력하고 회개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다만 그리스도에게로 나오십시오. 와서 회개하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진정으로 통회자복하는 믿는 자가 되기까지는 결코 만족의 눈을 감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온전하고도 완전하게 실천해 내십시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은 좁은 문에 이르려고 노력하는데 그치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오십시오. 이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온 부르심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을 수 없이 여러분 불러내온 것처럼 지금 여러분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온전한 길로 들어서라는 명을 받고 있으나 약간 곁길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진 미덕이 아침 구름과 새벽이슬이 될 때에, 그것은 곧 분산되고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구원받도록, 영원하신 성령님의 부르심을 받도록 허락해주시기를 비는 바입니다.
Ⅱ. 나는 조금 남은 시간을 이용해서 주제를 바꾸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효과적인 소명을 잘 예시해 주는 것이라면, 따라서 오늘의 본문은 궁극적인 구원의 교리를 잘 묘사해주기도 합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회심해서 하나님의 선택의 교리에 대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겐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비참한 교리도 있습니다. 그런 교리는 말하기를 성도들이 가나안을 향해 떠나기는 했지만, 결코 목적지에는 이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 따위는 곧 믿는 자의 생애를 바로 이 지상에서 더도 말고 지옥으로 만들기에 족합니다. 내가 아무리 행복하다고 할지라도, 그런 교리는 나의 모든 정신적인 평안에 독약을 뿌리는 것입니다. 영광을 향해 떠난 순례자들이 온 힘을 다해 각자들이 시온에서 하나님을 뵈올 때까지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교리, 그러면서도 엉뚱하게 그리스도에 속한 양들이 이리들에게 갈기갈기 찢길 것이며, 영적 성전에 있는 돌들이 다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거룩한 몸에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며, 그리스도의 배우자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그 따위 교리는, 나의 이성, 나의 경험, 나의 믿음, 나의 전적인 영적 성품에 충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의 최후적인 구원을 믿습니다. 그들 속에 하나님의 중생하는 은혜가 성품을 변화시킨 역사를 이룬 이상엔, 끝내 구원을 얻고야 말 것을 단단히 믿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한 자라면, 죽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안에 살아 있는 씨가 있으면, 마귀가 그것을 멸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씨는 영원히 살아 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사신고로, 예수와 합해 하나가 된 모든 신자는 또한 살게 마련입니다.
그런즉 이제 우리가 가나안을 향해 떠났은즉,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주님에게 이끌림을 받아 영광으로 나아오는 자가 많게 되기를 목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 놓고 행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안식처에 이를 것입니다. 길을 인도하는 갑옷을 지닌 분이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탄탄히 보호함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둘레는 불의 벽이 둘러있고, 우리 위에는 그 사랑이 무궁하사 영원하시고, 변함없으신 여호와의 방패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길도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철과 놋으로 된 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날이 다 하도록 마냥 강건할 것입니다. 길이 험해도 우리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수리의 날개로 실어 나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로 돌에 발을 부딪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천사를 우리 위에 머물게 하십니다. 음부의 화실이 우리를 멸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방패의 갑옷을 주시니 우리에게 악한 일이 생기지 아니합니다. 마귀의 간교가 우리를 함정에 빠지게 하려고 하나 성공치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생기는 갖가지 시험에서부터 탈출로가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찌니, 이 세상과 음부의 세력으로는 하나님의 단 한사람의 순례자도 천국에 이르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오”(롬8:35)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것을 끝까지 지키실 것을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옳은 자의 길은 비치는 빛과 같아서 점점 완전한 날을 향해 비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기필코 천국에 이르리로다.
죄와 사단이라도
피로 씻음 받은 영혼을 멸할 수 없도다.
사단과 불신앙이 괴롭혀오매
구원받은 자가 혹 괴롬을 당할지라도
그러나 끝내 승리하고야 말지니
예수께서 기쁨으로 다루심이 분명한 연고로다.
귀하신 아드님의 보혈로 인해
우리는 헛되이 버림받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다스리로다.
오늘 오후 이 본문을 마치면서, 나는 여러분께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어디를 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안식의 항구에 대해 많이 생각하십시오. 새 예루살렘을 계시하고 있는 고귀한 성경을 연구하십시오. 천사의 비파에 익숙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처음 난 자의 일반적 모임과 교회에 나오십시오. 여러분들의 안식일의 묵상이 곧 밝아올 영원한 안식에 대한 묵상이 되게 하십시오.
다음으로, 우리는 왜 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가도록 부르신 연고로 우리는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아갈 힘을 주시며, 또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거소, 곧 성도의 즐거운 안식처를 향해 나가도록 만드는 생명적인 위력을 우리 안에 두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입니다. 사랑의 길은 우리를 인도합니다. 맹렬한 섭리의 구름기둥이 우리를 지시합니다. 약속이 우리를 지속시켜 줍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니, 제발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의심하지 맙시다.
이 본문에서 두세 가지 고려해야 할 사상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정력적인 행위올시다! 사람들은 졸고 있는 동안엔 구원받지 못합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천국행 길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났다.”
이것은 지적인 인식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바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서 우물쭈물한 방법으로 활동하지는 아니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에게 의탁하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무지한 미신적인 앞 못 보는 장님의 신세가 되어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확고한 결심입니다! 그들은 많은 좌절도 만났으나, 그들은 단호한 결심을 연기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들이 심중에 둔 것은 가나안뿐입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