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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104]
 
 
 
     
 
 
 
작성일 : 13-11-21 15:24
스펄전 설교-창세기(1) 10. 방주로 돌아온 비둘기(창 8:9)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4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창 8:9)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에서 밖으로 내어 보낸 사건은, 여러 시대를 걸쳐 많은 신학자들이 때로는 교훈을 삼으며, 또 흔히는 청중들에게 흥미를 돋우어 주던 무수한 비유를 만드는 자료로 사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 관계로 그 많은 비유를 일일이 언급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그 중 한 가지를 오늘 설교의 실례로 삼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렇게 공상하기도 합니다. 까마귀의 임무는 어둡고 무서운 율법을 내어놓은 것의 그림자이며, 그가 사람에게 결국 돌아오지 아니했다는 사실은 어떤 위로나 표적이나 소망의 징조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께서 복음을 보내신 것은 비둘기로 미리 알리셨는데, 그가 죄인에게 계속 돌아오는 것은 감람 잎사귀로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런 주석가들은 위대한 진리를 예시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율법을 대표하는 까마귀는 맹렬하고도, 거칠게 침울한 울음소리만 내는 고로 율법에는 조금도 평안이 없으며, 단지 복음을 대표하는 비둘기는 입에 감람 잎사귀를 가지고 온고로, 복음의 기초에는 평안이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고안되고 꾸며진 비유들도 혹 그런대로 가치가 있으며, 잘 분별 못하는 세대에게는 교훈이 되어 오고 있을지 모르나,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이상과 같은 유치한 비유들에 대해 그렇게 달갑게 입맛을 붙이지 아니했다고 해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하갈과 사라에 대해 “이것은 비유니라”고 한 것과 같은 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비유라고 언급한 비유는 누구나 얼마든지 보는 것을 좋게 생각합니다마는,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소위 영적인 자들, 이상야릇하고도 기묘하게 고안해낸 것을 우리는 함부로 추종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실마리가 분명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미로에 빠지기 쉬운데, 우리는 여하간 미로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이 사건이, 그 자체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제시하고 있는 의미를 들어서, 설교에 꼭 한번 사용해 보려고 하는 바입니다.
비둘기는 신자의 영혼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은 때때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모든 것을 관찰해 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어디서나 발밑에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오랫동안 날아다녀 보아도, 결국 자기 자신의 합당한 안식처로 돌아오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만족이 없습니다. 일단 자기 안에 영광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모신 체험이 있었던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안식이나 영광을 절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이 한 가지 사상을 전개하면서, 이 비둘기의 상징이 던져주고 있는 여러 가지 빛의 각도에서 사실을 고찰해 보고자 하는 바입니다.

Ⅰ. 첫째로, 자기의 항해를 발견코자 떠나간 비둘기를 한번 바라봅시다.
비둘기가 방주 안에 있을 때는 늘 안전했습니다. 기타의 모든 새들이 다 멸하고, 가축과 기는 것들도 모두 홍수로 죽었으나, 다른 은총을 받은 짐승들을 포함해서 이 비둘기는 복스럽게도 구출을 받았습니다. 비둘기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자기를 방주 안에 넣으신 하나님께서 거기서 잘 보호해 주신 때문입니다. 비둘기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배 안의 의인 노아가, 언제나 자기에게 그날의 모이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둘기는 방주 안에 둥지를 마련하고 거기서 마냥 행복하고 안락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날개를 펴고 이 안전한 배를 떠나 나르려고 합니다. 비둘기가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이런 문제를 우리 스스로에게 문의해 봅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악의 홍수가 기타 많은 사람들을 뒤덮을 때도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며, 우리의 회의와 공포가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 이르도록 위협해 오는 순간에도, 우리는 끄떡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제공받으며,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서 거처를 정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황량한 광야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구한 안식과 때를 따라 주는 섭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날기 위해서 날개를 펴며, 눈을 열어 먼 곳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내 영혼아, 그리스도 안에서 족하지 않느냐?
왜 그대는 다른 곳을 기웃거리고 있습니까?
왜 그대는 폭풍 솟는 샘물을 떠나 밑바닥이 깨어진 항아리 물을 찾고 있습니까?
왜 그대는 비옥한 땅을 떠나 메마른 바위땅을 찾으며, 왜 그대는 흐르는 강물을 버리고 오염되어 있는 저수지를 찾고 있습니까?
디나가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나 세겜의 장막을 찾아갈 때 스스로 범한 과오를 여러분은 기억해 보십시오(그녀는 강간당했음).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났을 때 어떻게 되었던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대는 자기의 남편 및 주인과 함께 집에 머물지 못합니까?
왜 그대는 모든 것이 공허하고 삭막한 저 먼 외지로 나가고 있습니까?
그러나 이런 우리 마음은 그리스도를 쉽게 떠나게 되고, 또 이런 우리 정신은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기타 어떤 다른 사랑을 찾아 먼 곳을 바라볼 가능성이 너무도 농후하다고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 비둘기는 날아갔습니까?
내가 먼저 드릴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답변은 비둘기가 날개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날개를 가진 피조물은 본능적으로 날려고 합니다. 날라 다닐 공간도 별로 없는 방주에서 그토록 오래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비둘기가 제일 먼저 마음대로 하고 싶었던 일은 자유롭게 날아보는 일이었을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저 구름을 지나 날 수도 없으며, 땅에 깔린 안개 속을 헤치고 나가 먼 곳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마는, 새는 날개가 있습니다. 새는 은빛 금빛을 한 깃털을 가진 날개가 있습니다. 이 날개는 무엇을 위해 있는 것입니까?
새는 날개가 있으므로 날아갑니다. 우리에게도 그 이치는 매한가지입니다. 우리의 혼은 영을 조금도 쉬게 할 수 없는 수다한 생각과 수다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공상만 없다면, 우리가 익숙히 알고 증거하고 있는 소수 명백한 진리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공상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확고히 진실하게 보이는 일들도 참으로 그런가하여 알아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론을 따지지 말고 순전하고 단순한 믿음에 머물면, 지금 이토록 우리를 괴롭히는 그 많은 불안을 노출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덤비는 이성적인 이론으로 말미암아 결론을 내리려 하고, 질문을 던지며, 문제를 제시하고, 탐구를 시도하며, 기타 여러 가지 난점들을 던져 우리는 심히 번거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의 혼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상의 테두리 속에 배회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혼은 많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능력은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우리의 영은 탐구여행을 떠나며, 발견의 항해를 떠나자는 시험을 받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더욱 더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이외에, 또 어떤 굉장한 사랑의 대상물이나 있는 줄 알아 애써 찾아나서는 모습과도 같습니다(그러나 사실 하나님 외에 또 어떤 사랑의 대상이 있겠습니까?).

비둘기가 날아가게 된 또 다른 하나의 이유가 있을 듯도 합니다. 이 비둘기는 전에 비둘기장에 산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 때 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비둘기에 편지를 매어 달아서 공중에 날려 보내던 일입니다. 우리는 상상하기를 그 비둘기가 편지를 가지고 갈 길을 어떻게 알며, 또 그 비둘기는 편지를 보내고자 하는 바로 그곳으로 정확하게 갈 수 있을는지 어리석게도 의아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그 비결을 알았습니다. 비둘기는 그 편지를 자기가 전에 살던 집으로만 가지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그 편지를 가지고 다른 곳으로는 아무데도 가지 않습니다. 인간의 기술 가지고는 비둘기를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게 만들 수 없고, 단지 비둘기 자신이 살던 집을 향해서 나르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일단 비둘기는 공중으로 날아가서 높이높이 공중에 오릅니다. 높이 떠서는 열심히 찾는 눈초리로 여러 번 빙빙 돕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익숙하게 안식을 취하던 그곳을 발견해 냅니다. 그곳에는 자기의 어린 새끼 비둘기들이 자라던 곳이기도 합니다. 비둘기는 바로 그곳을 향해 돌진해 내려옵니다.(이렇게 해서 편지가 전달되는 것뿐입니다. 그런즉 우리 사람이 통신용 비둘기를 사용하는 것은, 전에 그가 살고 있던 곳으로 편지를 보낼 대만 사용하는 것이지, 전연 그가 살지 아니했던 곳으로는 아무리 편지를 매어달아 날려 보내도, 거기엔 가지 못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 본문으로 가봅시다. 방주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분명히 이 비둘기 새는 자기가 택한 곳을 많이 출입했을 것입니다. 즉 이 비둘기는 자기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자기의 어린 새끼들을 치던 그곳을 방주에 들어오기 전에는 무수히 들락날락 했었습니다. 자기의 마음은 곧장 전에 있던 그 보금자리로 향해 나갔던 것입니다. 이 비둘기는 이젠 오랫동안 방주 안에 있어 왔습니다마는, 그래도 방주에 들어오기 그 이전의 과거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방주 밖으로 날아가라는 자유를 얻기가 바쁘게, 자기가 살던 과거의 비둘기 집을 향해 날아가려고 시도했습니다. 물론 홍수에 다 쓸어져버리고 말았지만, 자기가 살던 과거의 그 집의 방향을 향해 날으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과 나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구주님을 알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안식이 그런대로 있었습니다. 구주님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기 이전에, 우리는 죄악 가운데서 쾌락을 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보금자리도 지었으며, 우리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우리는 결코 요동치 않고 오래오래 여기 살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우리는 이 현세의 허무한 것을 가지고 유행을 따라 그런대로 만족해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도 가졌고, 우리의 기쁨도 가졌고, 우리의 쾌락도 가졌고, 우리의 환희도 가졌습니다. 우리 속의 그 육적 옛 성품은 죽지 아니했습니다. 그 옛 성품이 자유를 가지자 그 옛날의 소굴을 찾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순간인데도 과거에 부르던 음탕한 노랫가락이 생각나지는 아니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도 여러분이 과거에 행하던 죄악의 그 어두운 그림자가 회상되지 아니했습니까?
물론 지금은 새 성품을 가지고서도 과거의 그 어두운 죄를 증오하고 있지만, 그래도 옛 성품이 그것을 향하고 있지는 아니했습니까?
육체가 땅에 묻혀 벌레 밥이 되기 전까지는 좀처럼 죽지 않는 그놈의 내부 비천한 마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과거의 애굽 고기를 삶던 고기가 바로 돌아가라고 속삭이지는 아니했습니까?
또 속박의 집에서 그토록 맛있던 애굽의 마늘과 부추와 파를 먹으러 가보지 않겠느냐고 속삭이지는 아니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비둘기 집은 아직도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아직은 최악을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따위의 죄의 씨앗이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옛 뱀이란 놈은 아직도 마음을 따라 슬금슬금 기어 다닙니다. 우리의 황금은 쇠똥으로 혼합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하늘엔 많은 구름이 끼어 있습니다. 아무리 맑은 강과 같은 우리 인간성에도 그 밑바닥에는 진흙덩이올시다. 비둘기가 자기의 옛 집을 회상했을 때 방주를 떠나 날라 갔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습니다. 나는 흔히 옛 추억이 우리의 영에 우세하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잊어버리고 그만 죄를 찾아 헤매게 되는 사실을 흔히 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비둘기는 노아에 의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은 안 될 말입니다.
피조물을 지배하는 특수한 동기가 비록 무엇이든 간에, 비둘기를 파송한 노아를 지배한 동기는 좀 더 차원 높은 동기였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에게 시험을 참고 견디도록 허용하는 때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마4:1)고 한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성령님에게 이끌림을 받았다고요?
성령님이 예수님을 어디로 인도하셨다고 했지요?
성령님은 예수께서 거룩한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의 아버지의 성전으로 인도하시지 아니 했겠습니까?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백성들에게 복된 소식을 선포할 수 있도록 산으로 인도하시지 아니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도 산으로도 인도하지 아니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했습니다. 그것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마6:13),(눅11:4)라는 기도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미련한 사람들은 이 탄원을 “우리로 시험의 자리에 두지 마옵소서”라고 바꾸어 버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구주님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 기도가 매우 온당한 기도일지는 모르나,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때때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들을 시험에 당면케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했다면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시험은 훌륭한 결과를 안겨다줍니다. 즉 그러한 시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처리되어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들의 유익이 됩니다.
비둘기는 물로 황폐한 땅위를 피곤하게 날아본 연후에야, 그 이전보다도 더 한층 방주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비둘기는 이 세상 어디서든 자기 발밑에 안식을 찾을 수가 없음을 똑똑히 눈으로 보고 안 연후에, 비로소 노아의 손에 있는 것 이상으로 평화로운 보금자리를 꾸밀 자리는 더 이상 없음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생각 나름대로 배회하고, 그들 마음 내키는 대로 날아가도록 일단 허용해 두십니다. 그것은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돌아다녀본 연후에 취하는 휴식이 더 한층 감미롭고, 더 한층 확고하게 되도록 하려는 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제거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제거하기도 하나, 이것은 그들이 어두움을 겪고 난 후에 태양의 고마움을 느끼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것을 배우면서, 허무한데서 허무한 곳으로 괜히 날아다녀보는 것입니다. 그 후에야 그들은 그들 자신의 참된 복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매어 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젠 그들은 평생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겪은 그 어둡고 비참한 체험이 더할 나위 없이 선하고 위로가 되는 결실을 맺게 해서, 이제 그들은 이 세상에서도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들을 위해 줄자가 아무도 없으며, 비록 천국에서라도 그들의 주 예수를 제외하고는 영혼을 만족시킬 자가 도무지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게 된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생각의 날개를 타고 방주를 멀리 떠나는 것을 보면, 시험에 빠져있는 그를 인해 가슴 아프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저 시험을 이기고 그가 다시 돌아와서 “내 영혼이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시116:7)라고 말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리스도 밖에서는 모든 것이 헛되며,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는 것은 쓰디쓰나 귀한 교훈이올시다.
나는 여러분께서 이 교훈을 철저히 배우시고 이제 곧 배우시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Ⅱ. 이제 우리는 안식을 찾지 못한 비둘기를 주목해 봅시다.

비둘기는 자기의 날개를 가다듬고 이제 그 날개를 펴고 급하게 날아갑니다. 새로운 집을 찾아 날아가는 것입니다. 앞 절의 말씀에 따르면 겨우 보인다는 것은 산봉우리뿐입니다. 그것이 보이는 세계의 전부였다고 보겠습니다. 비둘기는 광대무변한 바다의 한 가운데 섬처럼 솟아 오른 산봉우리 위와 그 사이를 날아다닙니다. 이렇게 날다보니 비둘기는 맥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자기라도 무슨 수가 있다고 계속 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안식이 필요했습니다. 어디에 좀 쉬어볼까요? 저기 있는 까마귀는 아주 평안히 있습니다. 그놈은 떠내려가고 있는 큰 짐승의 시체 위에 올라 앉아 실컷 파먹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거기에 안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둘기는 그 천성이 부패한 것이라 하면 딱 질색입니다. 그는 악취 나는 물질을 피해 날아갑니다.
그런데 보자하니 저기에 나무가 한 그루 떠 있습니다. 숲속의 강한 군주의 하나인 이 나무는 세상을 뒤덮은 큰 태풍으로 부러져서, 지금은 마치 배의 돛대처럼 나뭇가지를 세워가지고 높이 두둥실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비둘기는 여기에라도 사뿐히 앉아 보려고 했으나, 이 나무는 덩치는 온통 진흙과 오물로 뒤덮혀 있습니다. 물 묻은 진흙이 자기에게 어울릴 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날개를 펴고 날아갔습니다. 또 저 멀리 있는 어떤 물체가 매력을 끌기에, 그는 죽을힘을 다해 날개의 힘을 내어 속력을 가해 날아가 보았습니다마는, 거기도 자기가 쉴 만한 곳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쪽으로, 북쪽으로, 남쪽으로 온 사방을 날아 봅니다. 그러나 어디든 자기가 발붙이고 안식할 곳은 찾을 수 없고 점점 날개가 피곤하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비둘기가 나른하게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는 것을 주시해 보노라면, 자기의 마음을 안착할 만한 이 세상적인 안식처를 찾아 헤매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에는 오래 지속되는 도성이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때때로 하나님의 순례자들이 광야를 헤매면서 거주지를 찾으려고 소원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들의 삭막한 마음은 곧 스스로 나약해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그들이 발붙여 안식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예수님은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주님께서 주시는 이 안식은 어떤 종류의 안식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는 이 안식은 인간의 모든 능력을 좀 활용하지 말고, 그냥 편히 쉬게 하는 안식을 구주님께서 의미한 것으로 믿습니다. 지식인들도 안식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본질적으로 안식을 구하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안식을 구합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고 고도의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이미 믿기로 개종했을 때이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십자가의 단순성을 경멸하지 쉽습니다. 나는 그들을 억지로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하여간 그들은 경외와 사랑을 바라보는 눈은 너무도 작게 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희랍인들이 붙들려 있던 옛 그물에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철학과 계시를 혼합하려는 욕구를 가집니다. 세련된 사상과 고도의 교육을 필한 사람에게도 시험은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그 단순한 진리에서 떠나, 문자 그대로 좀 더 복잡한 교리, 다시 말해서, 좀 더 지적인 교리를 고안해 내려고 하는 따위의 유혹이올시다. 이것은 곧 초대 기독교회를 노스틱주의로 몰아넣고, 또 각종의 이단종파로 쏠리게 하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네올로기(Neology~독일 계몽주의 신학. 계시의 내용을 이성적 진리에 한정시켜 실질적인 계시 개념을 공허하게 함~역자 주)의 근원이며, 또 지난 과거에 독일에서 한창 유행했고, 지금도 어떤 부류의 신학자들에게 대단하게 인기를 끌고 있는 기타 많은 신학사조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교육을 받았든 일체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단지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일진대, 여러분은 철학의 교훈이나 철학적 신학에서는 결코 안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릴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혹 어느 위대한 사상가에게서 이런 신조를 하나 받고, 또 어느 굉장한 이성론자에게서 저런 신조를 하나 받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마치 겨가 밀알에 비교되듯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비하면 한갖 껍질의 겨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이론의 최고로 다듬어 발견해 낸 것이라 해도, 그것은 참 진리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참 진리에 대한 정확성과 확고성을 결여한 그야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모든 충만한 지혜와 지식이 가득히 쌓여 있습니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도 유니테리안과 광교회(Broad Church : 자유주의적 신학경향을 가진 교회~역자 주)의 사상가들이 승인하는 것과 같은 체계로 만족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다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참으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는 밭가는 농부의 눈을 기쁨으로 빛나게 만들며, 경건한 청빈자의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아름다운 단순한 실재의 진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하러 세상에 오셨도다. 내가 죄인의 괴수로다!”(딤전1:15)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지성인이라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때만 예수님은 그를 만족시켜 드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중생한 사람의 마음도 안식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또한 만족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사랑해 줄 하나의 대상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너무도 지독할 정도로 자기 본위의 이기주의자라고 해서 온통 자기만 둘러싸고, 도무지 타인은 어느 누구 단 한 사람에게도 관심을 표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사람의 이름에 모독을 끼쳐오던 제아무리 악한 사람들이라도, 자기들의 마음이 머무는 한 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하나의 사랑의 대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대상이란 오래 전에 이미 죽고 없는 어린 자식새끼일지도 모릅니다. 잔디 밑에 잠자고 있는 어린 자식을 회상하노라면, 그것이 선으로 연결되는 하나의 접촉선이 됩니다. 아무리 완악한 사람들이라도 그들 모두는 제각기 자기 어머니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름이 자기의 가슴에 울려댑니다. 이렇듯 우리는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지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자기 혼자 외로이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강물처럼 흘러야 합니다. 흐르지 않고 괸못 같으면 우리 마음은 부패합니다. 혹자는 위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사랑을 나타내 보일 한 위대한 대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달콤하고 확고하게 사랑합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사랑에 너무도 황홀하고 확고하게 집착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고민도 몹시 할 사람들입니다. 즉 그들은 너무도 큰 사랑을 가지고 있는 나머지 그 사랑이 무가치한 대상이 되어 버릴 때, 그들이 받는 비참함과 절망도 따라서 굉장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엄숙하게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합하지 아니하는 어떤 대상이나, 어떤 인물로도 만족되지 아니한다는 사실이올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아내와 자녀를 위한 방도 있고, 친구와 친척을 위한 방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계실 방이 더욱 더 크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의 마음을 채우는 대상은 아내도 아니요, 자녀도 아니요, 친구도 아니요, 친척도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 입니다.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를 모셔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어디에 가도 인간에게 안식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우상을 만들어 온 어떤 그리스도인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여러분은 마음속에 어떤 종류의 하나님을 두고 오셨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주를 잊어버릴 정도로 피조물을 사랑해 오셨습니까?
그것이 자녀이든 남편이든 친구이든 하여간 우상 숭배의 죄를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피조물이 아무리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여러분은 그 피조물 가운데서 발붙일 안식을 찾을 수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목전에서 여러분이 가진 우상을 부서뜨립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우상을 그대로 두신다면, 그땐 여러분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역병과 저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17:5)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2:22).
여러분의 마음을 주 예수께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예수님은 결코 여러분을 실망케 하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애정을 가지고 주님께 의탁하십시오. 주님은 결코 여러분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던 모든 것, 사랑하던 모든 것을 가지고 주님께 온전히 바치고 나오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그 많은 재산과 여러분 영혼의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느부갓네살의 풀무불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더욱 더 뜨거워질 때까지 마음에 불을 붙이시오. 여기 여러분의 불꽃을 영원히 유지할 연료가 있습니다. 너무 깊어 측량할 수도 없는 바다 같은 사랑을 가진 여러분이십니까?
그래도 여러분은 구주님에게로 나가서 모든 것을 구주님께 내맡기십시오. 그리하면 구주님은 물 한 방울도 허비하시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받아 간직해 두셨다가, 다시 하나의 큰 사랑을 여러분에게 던져주실 것입니다. 이 사랑은 여러분이 주님께 준 사랑에 비하면 그야 말로 대양과 같아서, 여러분이 주었던 그 사랑은 나뭇가지에 붙은 이슬방울에 불과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에는 안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타 다른 곳에는 결단코 마음의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또한 판단을 내립니다.
어떤 사물의 옳고 그름을 따질 때에 일어나는 이런 판단은 흔히 양심이라고 불리워집니다.
양심이 한번 요동하면, 조용하게 하기란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양심은 자석의 바늘과 같아서 한번 그 자석의 극을 향해 돌면 떠는 동작을 결코 막을 길이 없습니다. 자석 바늘을 제자리로 갖다 놓기 전에는 안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요동하는 양심이 안식을 구하나 허사로다.
강한 욕망을 지닌 우리 영이 그리스도에게
나가기 전에는 편한 날이 없구나.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께 내맡기기까지는 양심의 영구한 평안을 우리는 결단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때때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기까지 하면서, 애써 자기의 소망을 자기가 겪은 체험이나, 자기의 감정이나, 자기의 기쁨이나, 또는 자기의 회개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서 스스로 확신하기를 이젠 하나님의 은혜나, 아니면 자기의 선행 등이 양자 중 어느 것을 인해서든지, 하나님과 자기 영혼 사이에 모든 문제가 잘 처리된 것으로 탄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여, 여러분은 여기서 영구한 평안을 즐길 수는 결단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지난 과거의 경험을 통해 아시거나 또는 아시고 계심이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은 그야말로 빈손 들고 먼저 그리스도에게로 나오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시는 분으로 영접하셔야 합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아니하면 여러분의 발은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피곤하게 날아만 가다가 마침내 실망하고서 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고귀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 
흰눈같은 의의 영광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 
중재의 기도를 하고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
팔의 능력과 마음의 사랑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
바로 이런 예수님만이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모든 사람들의 유일하고도 확고한 의지가 됨에 틀림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그리스도에게 기타 어떤 다른 것을 혼합한다면, 여러분의 양심은 고소하여 사단은 여러분의 마음에 울려 지는 소리를 듣고 여러분을 조롱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렵니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나는 다음의 사실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에게 부여된 능력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지 못하고, 그저 전체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우리의 전인적 인간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은 모든 우리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자신 밖에는 없다는 사실이겠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다른 정박소에 닻을 내리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으나, 모두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솔로몬은 한 사람의 성도라고 믿습니다. 또한 나는 그가 죄인이었던 것도 압니다. 또 나는 그가 생존했던 사람 가운데 가장 어리석었던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또한 나는 그가 사람 중에 가장 지혜로웠던 자임을 믿습니다. 그는 사실상 많은 모순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우리 모두를 위한 실험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우리 자력으로 감히 해낼 수 없는 사실을 그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너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 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2~11)라고 솔로몬은 외쳤습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8)
이게 무슨 말입니까?
모두가 헛되다니 이게 어이된 일입니까?
솔로몬에게는 그 많은 재산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강에서 바다에 이르기까지 그의 통치원이 미치고 있는데, 이것도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그의 번성했던 영광의 왕위도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레바논의 목재로 지은 집도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자기를 평안히 안식하도록 만드는 그 감미로운 소리들, 그리고 자기를 즐겁게 만들던 춤과 노래 등, 이 모든 것들도 아무 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그러나 그의 대답은 여전히 “그런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다. 다만 심신의 피곤만 더 할 따름이다”고 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모든 것을 시험하고 난 뒤 얻은 판결이 그러했습니다.
오, 사랑하는 형제여,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진다는 것,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맛을 맛본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전부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생애 이상으로 더 좋은 생이 있을까 알아보기 위해, 어떤 다른 형태의 인생살이를 시도해 볼 필요가 전연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잘라 말합니다. 여러분이 온 세계를 한번 돌아보십시오. 아니 영국에서 일본(또는 한국)까지 헤매며 한번 찾아보십시오. 여러분은 구주님의 얼굴 모습과 같은 모습은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호기 여러분이 인생의 모든 안락을 취했다하더라도 주님을 잃고 만다면, 여러분은 파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구주님만 모시고 있다면 비록 토굴에 있다 하더라도 그곳이 바로 낙원이 될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어렵게 살며 기근으로 죽는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은혜로 족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로 족할 것입니다.

Ⅲ. 우리는 잠시 시간을 내어 이 비둘기가 왜 발붙일 안식처를 발견치 못했던가를 생각해 봅시다.

비둘기에게 의지의 소원이 있었습니까?
비둘기는 어디서나 안식할 수 없게 된 불만스러운 새들 중의 하나였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둘기는 새로운 안식처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아니했더라면 비둘기가 안식처를 찾지 못했더라는 기사가 실리지 아니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결단코 평안히 안식을 취하지 못할 특수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안식을 얻을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불평만 늘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 안하든 여하간 불평만 갈수록 더 늘어놓습니다. 그들은 태양을 보고도 불평합니다. 
그러기에 톰프손은 그런 사람을 불러 “장미 빛 술고래”라고 합니다. 그들은 달빛이 창백하며, 병색을 띠고 있으며 자주 변한다고 투덜댑니다. 그들은 죽음이 친구를 빼앗아가는 무서운 것이라고 해서 죽음을 투덜댑니다. 그들은 삶도 투덜댑니다. 모든 사람은 죽어야 행복한 것인데 자기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괴로운 세상을 오래 오래 살도록 정해진 것이라고 삶 자체도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여러분들은 그들을 도저히 기쁘게 해 줄 재간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만사는 너무 뜨겁지 않으면 너무 차고, 너무 어리지 않으면 너무 늙었고, 너무 거칠지 않으면 너무 매끄럽고, 너무 높지 않으면 너무 낮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만족하게 해 줄 것이라고는 이 지상에 아무 것도 없노라고 마음속으로 결정해 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원의 극단적인 표준을 정해 놓고 있는데, 세상은 그것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풀도 만족하리만큼 푸르지 못하며, 소에서 나온 우유도 그들이 마시기에는 그리 적당한 음료가 되지 못하며, 포도에서 짜낸 포도주도 그들의 입맛에는 족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온 피조물에 단 하나의 기관만 사용해서 느껴보려고 합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온 피조물에 대해 쓸 수 있는 인간의 오관 중 단 하나의 기관은 코밖에 없는 줄로 알아서 냄새를 맡습니다. 그러기에 구역질이 나는 수밖에는 없지요! 이런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이 지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소화불량에 걸렸으며, 그들의 간장은 고장이 났습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세상엔 아무 것도 없겠지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천하고 멸시 받을 것만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그와 같이 말할 때, 여러분은 그들의 한 말을 정확하게 판별해서 그들의 언급을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사실 자기들의 판단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리석고 반 미쳐버린 감정의 영향 아래서 말만 그렇게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명랑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그렇게 만족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흔히 특출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마는, 반면에 사물의 밝은 면을 항상 바라봅니다(여러분의 친구도 그런 사람을 두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좀 잘못된 일이 있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다양성으로 취급해서 “그래, 이것은 하나의 변화이구나”라고 말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괴롭다고 하는 곳에서도 그들은 만족해합니다. 이렇게 개종한 이 사람들이 이젠 그리스도 밖에서는 만족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 그들의 판결을 고려해볼 가치가 다분히 있습니다. 비둘기는 발붙일 안식처를 찾았으나 허사였습니다.

내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늘 아래도 없고, 별 아래도 일체 없다고 내가 부득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의지의 소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을 모시고, 그 분으로 하여금 나의 커다란 기대들을 채워 주시게 맡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나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런 것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인은 온통 우울한 소화불량 환자의 일단으로 여기며,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에 붙어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불행을 행복으로 만드는 데에 도와줄 것이 일체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종교를 자기들의 우울한 성품과 동등시한다고들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명랑하고 다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어느 것 안에도 우리는 발붙여 안식할 곳이 없습니다.
비둘기가 안식처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그저 바라볼 눈을 가지지 아니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나는 비둘기가 눈으로 어느 거리까지 식별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식별력이 미치는 거리는 내가 믿기기 어려울 만큼 먼 거리까지 미칠 것으로 봅니다. 비둘기는 때로는 높이까지 오릅니다. 우리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하나, 비둘기는 자기의 비둘기집을 식별하고 거기로 쏜살처럼 내려갑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그의 주님 밖에서는 아무런 기쁨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즐겁고 기쁜 사물을 바라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아름다운 음악의 멜로디가 흘러나오면, 그것을 식별하고 좋아하며 즐길 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단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처럼 그것을 맛볼 미각이 역시 훌륭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재산이나 또는 소위 세상이 말하는 쾌락이 있으면 그것을 온전히 다 볼 줄 압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런 것을 못 보는 장님은 아닙니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인들도 식별력이 예민하고, 노련하게 맛을 알고, 또 쾌락을 감상하기를 다른 사람 못지않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인들은 광적이 아니며, 사물에 집착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그들의 바라보는 환상은 세상의 모든 쾌락을 총 망라하고 있어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은 물론 맛을 보기까지도 합니다마는,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비둘기가 발붙일 안식처를 찾지 못했던 것처럼, 그런 세상의 모든 것과 쾌락으로서는 안식처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봅시다. 이 비둘기가 쉴만한 곳을 찾지 못한 이유는 거기에 이를 날개가 없기 때문은 아닙니다.
비둘기의 날개는 강했고 재빠른 것이었습니다. 비둘기도 까마귀만큼 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까마귀보다도 더 빨리 멀리까지 날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도 자기가 원하기만 한다면 쾌락 속으로 뛰어 들어갈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쾌락 속으로 뛰어들지 아니하는 이유가, 그리스도인이 청년의 시절을 떠나 늙고 시들어져서 그만 육신의 쾌락이 자기에게 더 이상 시험거리가 되지 않게 된 때문은 아닙니다. 결단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혹자는 개종했지만, 그들은 세상의 쾌락을 맛보려 하다가 그 쾌락을 즐길 수 없게 되자, 그만 부득불 쾌락을 포기하고 돌아서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다른 죄인들로부터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 혹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젊고 건장하며 혈기 왕성합니다. 뼈에 힘도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모든 쾌락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으며, 감각적인 쾌락의 최선봉에 뛰어들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용기가 결핍된 것도 아니며 힘이 결핍된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적인 쾌락 속에서 발붙일 안식처를 찾을 수 없노라고 엄숙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부득불 그런 고백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안식을 찾아 노력하며, 애쓰며, 세상으로 만족해 보고자 소원해 보기도 했으나, 세상의 보물로는 내적 공허를 채울 도리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헛된 것으로 만드십니다.

그럼 이 비둘기가 안식처를 찾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지의 결핍도 아니며, 눈의 결핍도 아니며, 날개의 결핍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것이니, 곧 이 짐승은 하나의 비둘기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비둘기가 만약 까마귀였더라면 발붙일 많은 안식처를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비둘기가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따라서 쉬지 못하게 된 것은 비둘기 자신의 성품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적인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도저히 그런 세상적인 것으로 안식할 수 없는 하나의 새로운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 마음은 계속 외치기를 “올라가라, 올라가, 올라가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려느냐?”고 합니다. 또 새 피조물은 외칩니다.
“너의 장막을 박차고 나오너라. 너는 여기서는 영구한 도성을 취할 수 없노라. 이 불모지 광야에서 도성을 만들고자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떠나오라.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 있느냐?”라고 외칩니다.
그야말로 만일에 내가 다시 중생 못한 사람으로 되어 버린다면(그럴 수가 없지만) 그땐 세상이 나를 족하게 만들지 모르나, 중생한 나로서는 내가 어떤 사회에 던짐을 받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만이 만족이 되시기 때문에, 달리 어떻게 만족을 소원할 수도 없으며, 결코 소원하지도 않을 것이며, 소원해서도 안 되는 연고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서는 어디서든 만족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하나의 거대한 시험거리인 줄을 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세상으로 인한 만족의 여하가 여러분을 시험하고 여러분을 어떤 사람인가 갈라놓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자가 “나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나는 남들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원치 않습니다. 나에게 이런 것 저런 것만 주시오. 그리하면 그것으로 나는 아주 족하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런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너무도 비슷하군요. 그것은 마치 까마귀가 죽은 짐승의 시체로 만족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려. 그러나 그대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대는 다른 곳에서 만족을 찾으실 것입니다. 그대는 시고 쓴 모든 시련을 겪음으로 인해서 부득불 세상적인 것에서 돌아서서, 그대의 방주로 다시 날아오고야 말 것입니다.”

Ⅳ. 실망을 당한 비둘기가 행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느 곳에서도 만족을 찾지 못한 비둘기가 그 다음에 한 일은 무엇입니까?
비둘기는 방주로 다시 날아왔습니다.
요셉프스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비둘기는 온통 물에 젖고 진흙에 묻은 날개와 발을 가지고 노아에게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요셉프스가 그렇게 말한 이상, 이것에 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는 않겠습니다 마는, 여러분 가운데 혹자는 물에 젖고 진흙에 묻으면서 자라왔음을 말씀해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여러분께서 엉뚱하게도 이 세상에서 안식처를 찾으려고 노력해 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세상의 먼지만 온통 묻혔다는 것이겠습니다. 쉴 수 없는 곳에서 발을 붙이고 안식을 취하려고 하니 오염만 되고 말았을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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